홀쭉이 2011. 11. 30. 18:20

 

슬픈 주목(朱木) 

                                                          2011.11.29

  등산을 하는 사람이라면 해발 천 미터 이상급 산에서만 보는 나무가 있다. 

주목(朱木)이다. 

일부러 심지 않고선 주목은 일반적으로 낮은 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주목의 군락지라 불리는 곳은 대개 지리산,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리왕산 등으로

남한의 고산서열 10위권에 드는 험한산들이다.  같은 산에서라도 아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해발 천 이백 미터를 지나야 한다.

 

이런 혹한 속에서 산 놈과 죽은 놈이 공존하며 서로 천년을 버틴다.   덕유산(2011년 1월)

죽은 놈이 저렇게 당당하다.  혹한 속에서 사람들만 고통스럽고 찡그릴 뿐이다.

누가 저 죽은 놈의 위세를 보고 함부로 찌껄일 수 있겠는지.

 

  이른 아침부터 출발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정상부근 능선에 불쑥 나타나는 주목은 신비로운 데가 있다. 

더구나 고산의 혹독한 날씨를 견디며 천년을 살고 고사목이 되어서도 목질이 얼마나 단단한지 그 상태로 또한 천년을 버틴단다. 

고사목이 된 주목을 만지면 딱딱한 돌같다. 

이른 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다. 


  그래서인지 성장도 더뎌 우리가 산 정상 부근에서 마주치는 주목들은 키나 굵기는 작아도 웬만하면 백년이 넘은 것들이다. 

제법 큰 주목이라면 수백년은 된 고목(古木)들이다. 

그렇게 오래 사는 놈들이 사람들 사는 곳과는 한참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고고해 보인다.

 

1,450m 정상이 보일 즈음 주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리왕산 2011.10월

그야말로 독야청청(獨也靑靑)이다.

고산의 혹독한 조건 속에 말쑥한 수형을 갖추기가 힘들다.

하여 산 자가 있으면 그 곁에 죽은 자도 같이 있다.

이 정도면 수백년은 된 신목(神木)이다.

계곡 속에 있어 비교적 온전한 수형이다.

 

그런데 그런 주목이 더러 관공서나 일반 주택의 정원에도 심어져 있다. 

얼핏 보면 주목이 아닌 것 같은데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수형으로 반듯이 서 있다. 

짧고 뾰족한 잎은 너무 무성해서 나무를 가리고 껍질도 칙칙해서 전혀 주목스럽지 않다. 

구상나무나 전나무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주목으로서의 고고한 기품이나 분위기가 없다. 

태백산 주목.  죽은 놈들이 더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또 저렇게 천 년을 버텨낼 것이다.

역시 주목군락으로는 태백산이 제일 인 것 같다.

얼마나 심한 북풍한설이 한쪽으로 밀어 부쳤으면 돌처럼 딱딱한 나무가 저토록 휘어졌을지... (K.K.Lee님 블로거 사진 복사)

 

자주 다니는 체육관 앞에 서 있는 주목은 구청장의 취임기념식수 이름표를 달고 있다.  불쌍한 놈...  

지가 살던 태백준령의 청풍명월 속의 청정자연을 떠나 온갖 잡놈들이 섞여 사는 낮은 곳에서 찌든 공기와 후덥지근한 열기를 맞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거기서 주목은 고산지대의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그리워 할 것이다. 

아무리 혹독할지언정...  또 한번 인간은 지꼴릴데로 자연의 질서를 흐트려 놓는다. 


  인간들아.

  제발 좀 놔줘라. 


  나는 올 겨울에도 혹독한 눈보라를 헤치고 기진맥진 기어 올라가서라도 그곳에 초연이 서 있는 주목을 찾아서 보고야 말리라.


k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