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징비록

홀쭉이 2015. 2. 15. 17:11

징비록 (어이구일본)

2015.2.11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아본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참으로 가치있는 저술이고 국보(132)로 지정 받을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겪고 전란이전 당시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전란 중 조선이 당한 고초와 수모 그리고 전후 처리과정을 기록한 역사기록물이자 회고록이다.

 

그런데 씁쓸한 것은 징비록이 조선에서 출간된 지 얼마 후 일본에서 출간되어 읽혀졌다는 것이다.  당시 인쇄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일본은 조선에서 책을 구해 인쇄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뻔하다.  자신들의 실패한 전쟁에서 배우고 또 다른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 1695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大和屋)에서 간행되었다.

그리하여 300년 후 철갑선에다 대포를 장착한 군함을 이끌고 부산항에서 함포를 쏘며 무력시위를 했고 그 함대를 이끌고 서해로 들어와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본격화했다.  얼마 후 러일전쟁 끝 무렵 일본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마도해전(1905)에서 임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학익진 전법으로 괴멸시켰다.  대체   이런 넘들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들은 실패에서 배우고 진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는가.  일본을 아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  일본 관련 토론을 하려 해도 감정적인 분풀이 수준이다.  예전 한일 대학생 토론회가 있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유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한국의 대학생들의 격앙된 감정으로 정상적인 토론이 지속되기 어려워서였단다.  그리고 표절시비가 있었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나 이어령의 축소지향적 일본같은 은근히 일본을 비하하는 서적은 제법 인기를 끌며 회자된 적이 있었다.  반면 조영남이 일본을 제대로 알자며 출간한 친일선언은 그 본의와는 달리 엄청난 비난과 신변위협을 당하고서 책 폐간과 방송출연정지로 생계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를 망치게 하는 미래의 위험은 바로 그런 의식과 감정적 대응이다.  이런 것이 이웃 중국, 러시아 혹은 일본 같은 가상 적국에 빌미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태도나 배타성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혐일 극우파가 설치는 상황이 가장 무서운 잠재적 안보위험이다.

 

과연 징비록을 써 후손들에게 다시는 그런 전란의 고초와 수모를 당하지 말라고 한 류성룡 선생이 일본은 몰라도 무시해도 된다라고 했을까.  오히려 우리들에게 이놈들아!  왜놈들도 내 책을 보고 배워 힘을 키우는데 너희 놈들은 일본을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놈들이다.” 라고 노발대발하지 않겠는지

KW(81)

---  위키 백과사전 징비록설명  ---

징비록

징비록(懲毖錄)조선 선조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선조 25)에서 1598(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선조 37) 저술을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차

저술의 동기[편집]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왜란을 겪은 후 류성룡은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다. 이책의 내용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원망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1]

구성[편집]

《징비록》은 〈징비록〉 상·하의 두 권과 〈녹후잡기〉, 〈근포록〉(芹曝錄) 2, 〈진사록〉(辰巳錄) 9,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과 관계, 일본의 침략에 따른 조선 사회의 붕괴와 의병 봉기, 이순신의 승전, 전선 교착, 강화 교섭과 정유재란, 수군의 최후 공격, 일본군의 패퇴 등이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근포록은 저자가 올린 차() 및 계사(啓辭)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임진년(1592)으로부터 계사년(1593)까지 종군하는 동안의 장계를 수록하고 있다.

군문등록은 1595(선조 28)부터 1598(선조 31)까지 저자가 도체찰사로 재임 중의 문이류(文移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自敍)와 자발(自跋)이 들어 있다. 이 책의 처음 간행은 1633(인조 11) 저자의 아들 류진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그 전본도 간행되었다. 1695(숙종 21 : 일본 겐로쿠 8) 일본 교토(京都) 야마토야에서 중간하였으며, 1712(숙종 38)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할 것을 명령한 일이 있다.

책의 역사[편집]

  • 1604(선조 37) 저술을 끝냄.
  • 1633(인조 11)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이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내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 1647 다시 독립된 16 7책으로 간행했다.[2]
  • 1695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大和屋)에서 간행되었다.
  • 1712 숙종 때 《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된 것을 경계하여 금단하였다.
  • 1936 조선사편수회에서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하회리 종가(宗家)의 소장본인 저자 자필의 필사본(筆寫本)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 하여 300부를 영인하여 출간하였다.
  • 1958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西厓集)》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광사(廣史) 3집에도 《징비록》과 《녹후잡기》가 합쳐 수록되어 있다.
  • 2003 영역본 《The Book of Corrections을 최병현 교수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