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신변잡기)

라일락(Lilac)

홀쭉이 2016. 4. 10. 09:15

라일락(Lilac)-2

2016.4.10(일)

 

향기로만 치자면 이넘이 시셋말로 4월의 꽃중 '국대급' 혹은 '여신급'이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그 향기가 너무 진하고 자극적이어서 더러 꺼리는 친구도 있다.

자신은 은은한 것이 좋다면서 고개를 돌리는 척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감이 무뎌져 간다.

그 중에 후각이다.

쉽게 취해 마비가 되기도 하지만 기능이 약해져 냄새를 못 맡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나이가 되니 '라일락'이 좋다.

들이대듯 대담하고 노골적이며 자극적이지만 지금 내게 그게 어딘가.

좀 멋쩍긴 하지만 고맙고 기뻘 따름이다.

후끈 달아오르게 해주는데...

다 죽어가는 거시기를 한번 벌떡 세워 주겠다는데...

 

내가 발견한 인문학적 '통섭의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꽃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이땅의 새로운 점령군이었던 미군 소속의 한 식물채집가가

도봉산을 오르다 바위틈에서 본 그 꽃나무를 미국으로 가져가 육종하여 재탄생했다.

 

본명 '수수꽃다리'의 처녀가 점령군의 나라로 가서 '미쓰킴 라일락'으로 중년의 여인이 되어 돌아왔다.

산에 '산수유'가 없듯이 조선의 처녀 '수수꽃다리'는 없고

중년마담이 되어 정원에서 길가에서 '라일락'이란 이름으로 향기를 내뿜으며

제딴엔 선비의 후예인 척 젊잔빼는 남자놈들의 혼을 빼놓는다.

아....  어쩔건가.

그녀는 '환향녀'인 걸.

 

조선 중기 북쪽 오랑캐의 나라에 노리개로

일제시대 왜놈에게 위안부로 끌려가고

그리고 해방 이후 점령군 미군에게 팔려가고...

 

학명 '미쓰킴 라일락(MissKim Lilac)'...

그들 식으로 결혼한 여자의 이름처럼...

그것도 불편하니 그냥 '라일락'으로 부른다.

'수잔',  '제니',  '메리',  '마싸'로...

미군부대 근처 위락가 아가씨들처럼

 

...............

 

아마도 처음에는 은은한 향기였을지 모른다.

이름처럼 말이다.

'수수꽃다리'

 

본래의 향기와 이름마저 잃어버린 가여운 처녀.

 

그녀의 육체가 더렵혀지고

진한 색조화장을 하고 자극적인 향수를 뿌렸을지언정

어찌 고개를 돌리겠는지.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

아....

어린 시절 나를 업어 키우던 사촌누나의

화사한 살냄새를

 

(등 뒤에 느낌이 이상했던지 누나는 나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ㅎㅎ)

 

KW

 

강남 대치동 빌딩들 사이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라일락

이 정도면 동네 하나는 그 진한 향기로 접수를 한 셈이다.

지나가던 나도 취하고 말았으니 ㅎㅎㅎㅎㅎ

통쾌한 복수이고 거부 못할 유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