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2009.5.3
작년부터 봄.가을에 한번씩 부모님을 모시고
인근을 다니며 바람을 쐬드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봐야 나날이 다르게 늙어가는
부모님 생전에 몇 번이나 모시고 다닐 수
있겠는지.
작년 가을엔 부모님과 지리산 자락을 한바퀴
휘휘 둘러보고 삼천포에서 고성을 지나 충무
해안가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의외로 창녕
우포를 보고싶다 하셨다. 해서 고향인 대곡과
의령을 지나 창녕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은
내가 아주 어릴적 부모님이 생계를 위하여
행상을 다니던 행로였다. 하필이면 남강수계를
따라 낙동강까지 연결하는 평소에 내가 가고
싶었던 코스이기도 했다. (진주 -> 대곡 ->
명주골 -> 덕교 -> 상정 -> 의령 -> 궁유(호암
생가) -> 신반(백산생가) -> 창녕(우포))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강은 남지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쳐진다. 과연 굽이 굽이 300리
물길은 영남의 곡창지대를 적시고 남는 물은
받아 낙동강으로 넘겨주었다. 강변의 초목은
가릴 것 없는 대지위에서 한껏 태양의 흠모를
받으며 싱싱하고 건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산뜻한 산바람과 강바람을 맞으며 폐를
잔뜩 채웠지만 따사로운 햇살에 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대곡, 명주, 상정,
덕교… 그곳은 엄마가 가장 힘든 시절의 행상로
였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 그때가 엄마인생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길 모퉁이, 정자나무, 개울,
오두막 하나 하나가 엄마의 사연이 서려있는
길이였다.
내가 어릴적 친척의 잔칫날에는 더러 노래를
불렀는데 친지들의 등살에 못이겨 엄마는 분위기
깨지 않으려 나지막히 불렀던 노래가 있었다. 나중
에야 제목도 뜻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마 평생
의 회한과 억눌린 갈망이였다.
----------------------------------------------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의령읍으로 나와 적벽의 고갯길에 올라서는
언덕아래로 남강이 굽이굽이 의령과 저넘어
함안들판을 적시고 있었다. 다시 몇 킬로를
더 가니 궁유면이 나오고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씨의 생가가 있었다. 그간 그길을
지나면서도 여태껏 한번도 들어가보질 못했는데
부모님 덕택에 볼 수 있었다. 막상 동네로
들어서니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차도 세우기가
마땅찮았다. 아무튼 담장너머로 본 호암생가는
“과연…” 이란 찬탄을 할 정도로 명당처럼 보였다.
의령 자굴산과 한우산의 끝자락 나지막한 동산
아래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아늑했다.
그곳을 나와 ‘신반’으로 가는 길에 ‘백산생가’가
있어 들렀다. ‘백산선생(안희제)’은 지난 일제시절
부산에서 조선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창업하여 큰 돈을 벌어 중국에서 임정
활동을 하는 ‘백범’ 김구선생’에게 군자금을 조달
하며 독립활동을 도왔고 대구에선 근대학교를 설립
하여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분이다. 당시 조선에는
‘백산’이 그리고 나라 밖에서는 ‘백범’이 나라를 지켜
려 분투를 했다 해서 ‘양백(兩白)”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난 80년초반 TV드라마로 ‘오지명’씨가 안희제선생
으로 열연하여 당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드라마에서 백산선생의 숭고한 애국
애족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작은형은 큰 조카
이름을 ‘백산(白山)’ 이라고 지었다. 작년 이맘때
선생의 생가에 들렀을 때 생가는 비어있었고 곁에
있는 큰 솟을대문의 순흥 안씨 대종가에는 초로의
종부(宗婦)만이 쓸쓸히 종가를 지키고 있었다. 마당
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하자 종부께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여 조카의 이름을 얘기하며 백산선생을
흠모하는 얘길 했더니 곱게 늙은 종부께서 한동안
내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다.
작년이나 지금이나 그곳은 방문객이 뜸했다. 순흥안씨
집성촌이며 대종가가 있는 마을 앞으로 넓은 유곡들판과
한우산에서 내려온 시퍼런 유곡천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을 뒤로 울창하고 싱싱하게 반짝이는 숲은 그 옛날
만석꾼으로서 선각자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선생의
위안일 것이다. 뒷산에서 내려온 새들이 많았다.
한 무리의 참새는 텅 빈 선생의 생가의 마당정원에
있던 유난히도 푸른 벽오동 가지에 앉아 한동안
재잘거렸다. 선생의 푸른 기상과 열정을 알런지.
여느 관광지답지 않게 고즈넉하고 유유자적한 걸음이
였지만 폐가처럼 쓸쓸한 그곳 분위기에 슬퍼지기도
했다. 좀 전에 들렀던 호암생가에 비하면 차라리
울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기야 조카이름을
선생의 호를 따라 ‘백산’이라고 이름을 짓고 부르지만
정작 형이나 조카도 와본 적이 없으니…
구경하느라 배고픔을 잊고 있다가 적포대교로 해서
낙동강을 건너 조그만 소읍의 길가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 엄마는 식전에 정량인 소주 두 잔을
단숨에 마셨다. 식후에 식곤증과 함께 차안에서
기대어 졸까 생각했는데 아들과의 봄나들이가
좋았는지 생생하기만 했다. 지나치는 풍경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반짝이는 눈으로 내가 행여
운전중 졸지 않을까 감시를 하고 있었다.
남강과 낙동강을 따라 150km를 달려와 도착한
우포는 작년여름 ‘람사르 총회’의 뒷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여느 관광지보다는 덜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입구의 우포
생태관을 보고 나와 창녕읍내를 지내 이방리로
들어서 내가 알고 있는 목포, 사지포 늪으로
부모님을 안내했다. 다행히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아 우포늪 전체를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목포에서 우포로 그리고 낙동강으로
흐르는 토평천으로의 뚝방길은 여전히 원시와
환상 그대로였다. SLR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후회하며 똑딱이에다 몇 장을
담을 수 있었다.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곳을 부모님과 같이 바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2009년의 봄날은 가고 있다.
EOM
'여행기(돌아댕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곡릉천과 한강 (2010년 1월 16일) (0) | 2010.01.22 |
---|---|
새를 따라간 여행 (0) | 2009.12.11 |
가을 나들이 (PTC와 함께) (0) | 2009.11.17 |
포천 허브아일랜드 (0) | 2009.09.14 |
영남알프스 한바퀴 (0) | 2009.07.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