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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문학·음악·사진)

추사 김정희_3 (추사 유감)

by 홀쭉이 2018. 11. 11.

추사(秋史) 김정희_3 (유감)

2018. 11.10


꾹 참고 있다 이 글을 막상 쓰려니 추사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나서 찍었던 인장 중에 <불계공졸, 不計工拙>이 있어 멈칫하게 한다.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를 평하는 것은 그의 예술세계나 학문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이야 그 근처에도 못가는 나같은 이가 평할 처지가 못된다. 후세로서 다만 아쉬움이 남는 점은 이런 노력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 정도로 말하고 싶다. 고집이겠지만 이렇게 마무리를 해야 그에게서 벗어나 다른 화두를 잡을 수 있을 것같다.



추사는 태어날 때부터 권문세도가의 장손이 되어 왕실과 가문으로부터 촉망받으며 자랐다. 선친의 권력에 줄을 대려 했든 아니면 추사의 영특함에 반한 것이든 스스로 가르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중 서자 출신으로 당시 청나라 사신일행의 수행차 연경(베이징)을 다녀온 북학파인 박제가가 유년시절 추사를 가르쳤다. 비록 서출이지만 스승 박제가에게 배웠다면 당시 쟁쟁했던 홍대용, 박지원, 이득무, 유득공 같은 북학파와 실학파 거두 정약용을 알게 되는 길이었다. 아무튼 23세 때 추사는 마침 부친 김노경이 동지부사(사절단장)가 되어 연경을 갈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수행을 하게 되었다. 스승 박제가의 영향이었던지 벼르고 벼른 연경행에서 추사는 일생일대의 개안(開眼)을 경험하고 학문적 대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청나라의 최고 석학들(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고 이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추사가 시, 서화, 서예를 했던 예술가 혹은 금석학, 고증학, 역사학을 했던 학자로서 그 외 불교나 민속에도 조예가 깊었다지만 성균관대사성, 이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상당한 요직을 거친 정치인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우리한테 널리 알려진 그의 예술세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청장년기에 스승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와의 교류 그리고 두 차례의 연경행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청나라를 통한 서양의 근대문명이다. 조금 앞선 선배였지만 정조 시절부터 이미 홍대용, 박지원, 이득무, 유득공 같은 선구자들의 개안된 저술들이 많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추사 시절 조선에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이양선이 출몰하여 소동을 벌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21세기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대격변과 혼란 속에서 서양 근세의 부재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마치 유년기에서 격동의 청년기를 건너뛰고 갑자기 다가온 장년을 맞은 삶의 무게가 너무 벅차다. 우리사회가 이 격동기를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긴 한숨만 나올 때 그 시기를 살았던 그리고 우리가 추앙하는 인물에게 막연한 원구신감이 생기는 것은 나뿐일까. 그런 점에서 그는 당시에 일세를 풍미하며 참으로 인생을 만끽하고 잘 살다 간 사람이지만 곧 다가올 미래와 백성 그리고 나라의 처지를 제대로 못 본 사람이었다.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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