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미
2019.3.1
지난 세기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벌어진 인류 사상 최대규모의 2차대전으로 전세계는 전쟁터가 되었다. 하여 인류는 그 대전쟁 이후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 한다. 당장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전후세대'라 부른다. 그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을 겪었느냐 겪지 않았느냐는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당시에는 전쟁터가 되지 않았지만 이후 6.25 전쟁(1950~1953)으로 그 참혹함을 겪고 전후세대를 칭한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났다고 우리같은 식민지 포함 피정복민의 모든 나라가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였다. 전쟁에서 승전국이었던 제국들에 속한 여러 식민국들은 독립하지 못했고 특히 동구권의 대부분 나라들은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간접 통치와 간섭을 받는 위성국이 되었다. 여기에 일제시절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고 그것이 독립으로 이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임정 이전 독립투사들은 중국에서 일본요인 암살과 주재소나 관공서를 습격을 하는 식이었고 외국 언론상으론 국제테러단체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하여 당시 중화민국의 정부에서는 테러단체 지원 대신 우리 지사들에게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그들과 공조하면 재정지원 포함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하여 준비기간도 짧고 태부족인 인원으로 임시정부를 출범할 수 밖에 없었고 한 명이 여러 장관을 겸직하는 등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화민국 정부(국민당)로부터 상해 임정 사무실과 매월 상당한 지원금(지금 돈으로 매 월 수 십억 정도)을 받았고 당시 조선과 외국 동포들로부터의 비밀 성금과 함께 정부를 꾸려 독립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임정이 1932년에 수 억의 중국인도 감히 엄두를 못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성공하고 1940년에 광복군을 창설하여 중화민국(국민당군)과 공조하여 중일전쟁에서 측면 지원하자 중화민국 정부는 크게 고무되어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하여 서방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는 1943년 11월 전후처리에 대해 처음으로 미.영.중 연합국의 정상이 협의하는 카이로회담에서 중화민국을 대표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제의했고 몇 일 후 그 내용은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한 테헤란에서 재확약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에 당시 임정활동은 결정적이었고 해방 이후 1948년에 정부수립하여 그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했고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헌법상에도 명시했던 것이다.(제헌헌법 제1호)
아무리 식민지 시절 타국에서 초라한 임시정부였지만 그것으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뿌리이자 자존심의 원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정신을 훼손하는 정부수립일 건국절 논란은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는 반역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고 남한정부 수립 71주년으로 말하자.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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