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내사랑(2)
2011.5.11(수)
1980년대 학창시절은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었다.
대학생이 주축이 된 대규모 민주화 시위는 우리나라 정치사의 획기적 사건을 만들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의 열기가 가득했고 부산은 그 정점에 있었던 도시였다.
하여 정치나 민주화에 관심이 적었던 학생들조차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고 가담 혹은 방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때였다. 그 분위기에서는 중도나 제3의 길이 없었다. 오로지 운동권과 비운동권만 있을 뿐이였다. 당연히 운동권이 주류였고 그외는 비운동권으로 비주류였다.
당시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일약 대스타로 발돌움하고 연타석 히트곡을 내며 승승장구하고 토속색 짙은 '한오백년', '따오기', '강원도 아리랑', '진도아리랑', '새타령', '성주풀이' 등을 리바이블하여 국민가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마약복용사건으로 한동안 가수 활동정지를 당하여 공백기간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학생회 간부로서 교내 혹은 정문 앞에서 연일 벌어지는 민주화 시위를 안타깝게 보다 차라리 당시 활동중지중인 조용필을 초청하여 공연을 마치고 그 분위기 속에서 시내진입을 하면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 배경에는 조용필이 우리 민족의 '恨의 정서'를 표현해줄 최적임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정권을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하지만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혼자만의 상상이였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우리 국민가수를 추락시키는 지름길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용필이 수락도 않했겠지만...
조용필을 나는 감히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베토벤이라 부른다.
폭풍같은 열정과 장중함 그리고 여리고 세밀함 게다가 구수한 향토성 짙은 음색, 동요적이면서 짙은 우수를 표현하고, 眞聲과 假聲을 왔다갔다 하며 복고적이면서 시대를 앞서간 프로그래시브적 시도들... 정말 그의 음악 안에서는 폭 넓은 다양한 시도가 들어있다.
지난 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였지만 가장 아픈 시기이기도 했다.
가장 아픈 시기에 나온 그의 노래중 '못찾겠다 꾀꼬리'는 그의 삶을 대변하는 곡이다.
작사 : 김순곤, 작곡 : 조용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꺼야
모두가 숨어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지
하나 둘 아이들은 돌아가 버리고
교회당 지붕위로 저 달이 떠올 때
까맣게 키가 큰 전봇대에 기대 앉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는데
강아지만 멍멍 난 그만 울어버렸지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이 숨어버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야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
눈을 감고 세어보니
지금은 내 나이는
찾을때도 됐는데 보일때도 됐는데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4집 디스크에 수록된 이곡은 이미 최고의 국민가수가 된 인간 조용필이 여전히 인생의 폭풍속에서 헤매며 그 답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이 있다. (당시 그는 첫번째 부인과 오랜 별거 끝에 이혼을 한 상태였다. 언론에서는 이혼후 첫부인은 산사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후 십수년이 흘러 미국공연과 함께 단 한번의 만남으로 불꽃같은 사랑을 불태우며 전격 재혼한 조용필은 지난 2003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두번째 부인을 잃었다. 정렬적인 사랑으로 몇년간 음악을 쉬었던 그에게 인생의 기로가 찾아왔고 그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歌王'이라는 수식어도 인간이라는 틀 속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조용필이였다.
그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못찾겠다 꾀꼬리이고 언제나 술래'인 것이다.
여름철새인 꾀꼬리는 숲속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지만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은 새다. 하여 우리 조상들은 꾀꼬리의 낭랑한 지저귐을 비유하여 많은 말을 만들어 써왔지만 정작 그 생김새는 잘 모르는 새였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보일듯이 보이지 않은 신기루이고 우리는 그것을 쫒는 영원한 술래로 노래했다.
꾀꼬리는 낭랑하고 아름다운 목청의 대명사였다.
꾀꼬리는 새끼 양육과 보호도 지극정성인 새다.
"펄펄 나는 저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라는 유리왕의 시가 생각나지 않는지...
오늘은 여기까지...
kw
PS : 조용필의 첫째 부인은 충남출신 3선의 박찬씨의 딸이다. 조용필의 '단발머리'는 박지숙의 대학시절 모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은 90년대 중반 당시 미국교포 이세로서 유복한 안진현씨인데 조용필은 이혼후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필받아 청혼을 했고 전격 결혼했다. 안씨와 결혼중 음악활동을 일시 중단하거나 공연회수를 줄여 그녀와 불꽃같은 사랑을 불태웠다. 그랬던 그녀는 지난 2003년 겨울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겨진 조용필에게는 음악만이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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