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5월
(큰 이모)
2011.5.31(화)
1.
새벽에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거실 바닥위를 사뿐 사뿐 걷는 소리와 달그닥 거리는 소리.
몸이 노곤하고 몽롱했지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방에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40분.
거실로 나가 불을 켜고 다시 애들 자는 방에서도 불을 켜고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불을 끄고 소파에 앉았지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두운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불현듯 엊그제 별세한 이모님이 생각나 왈칵 울음이 목에 걸렸다.
"아... 이모님이 오셨구나!!!"
"오늘이 장례식인데 하늘로 돌아가기전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다녀가셨구나!!!"
이모님은 지난 6년반을 병상에서 사투를 하는 중 그간 몇번 못가 뵌 내 죄책감마져 풀어줘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오신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두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얼마간 훌쩍 거리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면서 편안한 기분이 되어 다시 잠이 들었다.
2.
지금으로부터 7년전 내가 아직 네덜란드에서 거주할 때였다.
그해 우리 부모님과 함께 이모님은 네덜란드 우리집에 열흘 정도 머물며 우리가족과 함께 인근 유럽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별로 피곤한 내색도 없이 건강한 분이였다.
유럽 여행 내내 오히려 이모님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을 부축하거나 휠체어를 밀어줄 정도였다.
그리고 몇달후 육체도 정신도 꼿꼿했던 이모님이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지셨다.
그후로 6년반 동안을 의식불명상태로 병원과 이종사촌형제의 집을 오가며 투병을 하셨다.
처음 쓰러진 후 혼수상태로 몇년이 지나자 가족들이 지쳐갔고 결국 몹시 수척해진 해골같은 몸으로 엊그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부음을 받은 곳은 뜻밖에도 부산에서였다.
친구들과 소매물도를 다녀와 다음날 주남지와 노무현생가와 화포천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부산의 장례식장에 들러 문상을 할 수 있었다.
이미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이 모여있었다.
이모님은 마지막까지도 내게 배려를 하신 것같았다.
그리고 내 묵은 죄책감까지도 풀어주려 오늘 새벽에 살포시 다녀가셨다.
3.
큰 이모님의 이름은 '일순' 이였다.
딸이 천대받던 시절 딸 셋중 장녀로 첫째이니 '一順',
둘째였던 엄마는 '二順(둘순)'이고 셋째인 작은 이모는 '三順' 이였다.
큰 이모님은 산을 몇개 넘어 외진 마을의 키크고 잘생긴 이모부님과 열여덟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보니 조부모와 장남인 이모부님을 포함하여 구 남매의 대가족이였다.
나중에 이모님도 이종형제를 낳자 좁은 방에 대여섯명씩 재우기도 집이 좁았고 식사시간이면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한다.
좁은 시골에서는 대가족을 먹여살릴 방도가 없자 이모부님은 모두를 이끌고 예전에 낙동강하구의 뻘과 쓰레기 매립장이였던 지금의 부산 하단 삼거리 부근에 터전을 잡았다.
버려진 쓰레기 매립장을 개간하여 상치.쑥갓.무.배추 등 대가족의 일손을 활용하는 근교농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농사로 대가족의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모는 인근 낙동강 하구에서 재첩을 가져와 하루에 수십리를 재첩국동이를 머리에 이고 이동네 저동네를 다니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자 어망공장을 세워 고향에서 사람을 불러 공장을 돌렸다.
그동안 이모부님 형제들이 하나 둘 모두 시집.장가를 가서 분가도 하고... 그래도 이모님 댁 근처는 패밀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일종의 집성촌이였다.
80년대초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는 형편상 진주 본가에서 보내는 돈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여 나는 대학시절 내내 하단 이모댁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용돈을 타 썼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진주 우리집은 나날이 어려워 집도 팔고 나중엔 전세도 유지가 어려워 월세를 살기도 했다.
그때 이모님은 항상 큰 도움으로 우리 집안을 지탱해주셨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여겼던 이모댁은 낙동강 갈대로 엮은 초가지붕에 얼기설기 지은 목조였다.
당시 내가 갈 때 마다 본 것은 이모님이 헤진 양말이나 옷가지를 꿰메는 것이였다.
억세고 강단있는 여자였고 동시에 사업적 수완이나 세상에 대한 견문도 넓었다.
이제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손자까지 장성하여 증손자를 보려는 때에 이르러 7년전 네덜란드 우리집에 오신 것이 첫 해외나들이라고 듣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모님의 마지막 해외나들이였다.
겉으로 억척같고 거칠어 보였어도 이모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는 그토록 엄격하고 검소했던 분이였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소서
그리고 살아 생전에 우리에게 했듯이 그곳에서도 잘 보살펴 주소서...
웅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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