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알카밀과 프리드리히2세)
2011.7.28(목)
내가 이 이야기를 안하면 목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아!!
지난주 우연히 EBS의 한 프로그램을 보다 횡재를 했다.
13세기 로마교황청이 기세를 떨치며 유럽의 모든 왕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 무렵
교황의 명으로 모든 왕들이 예루살렘 성지탈환을 기치로 십자군 전쟁을 나섰는데 당시 중동의
이슬람 세력도 동방무역 중계로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서 지리한
장기전으로 들어섰다.
거의 백년동안이나 수차례의 원정에도 부분 정복은 했어도 완전정복은 되지 않았고 유럽의 제국
들은 재정고갈과 군사력 쇠퇴로 패색이 짙어갔다.
참다 못한 교황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하던 프리드리히2세에게 신성로마제국황제로 봉하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오스트리아와 지금의 독일 그리고 인근의 동구권 땅까지도 넘겨주어 통치토록
하였다. 졸지에 조그만 섬나라 왕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2세는 교황의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십자군 성전에 나서야 했다.
당시 젊은 황제 프리드리히2세는 우리 세종대왕과 비슷하게 지적이고 박식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였다. 억지로 나선 전쟁에서 대규모 선단을 꾸려 이슬람 진영으로 이동하던중 장티푸스가
도져 많은 군사들을 잃고 자신도 병에 걸려 회항하고 말았다.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겁쟁이 황제에
격분한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주변국들로부터 왕따를 시켰다.
이후 프리드리히2세는 교황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 위해 고민하던중 당시 이슬람의 맹주로서 이집트를
통치하던 술탄 알카밀에게 편지를 썼다. 프리드리히2세는 놀랍게도 아랍어에 능통하여 친필로 쓴
편지를 알카밀에게 보내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수십차례의 편지교환으로 서로 깊이
이해하고 친분이 생겨 나중에는 교황의 친위대격인 템플턴의 기사가 지키는 요새에서 두 사람이 만나
중요한 협약을 맺었다.
알카밀 프리드리히2세
모두 8개조로 된 이 협약서는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적이고 상호 존중의 신사협정이였다.
중요한 내용으로는 기독교입장에서 예루살렘은 성지이고 이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므로
예루살렘 통치는 기독교 세력이 하고 다만 성소는 이슬람 세력이 관리하되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누구나 자유로히 입장하여 자신의 종교로 예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놀라운 협상성공을 이끈 프리드리히2세는 숨가쁘게 교황과 이웃나라 왕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교황의 반응은 싸늘했다.
원수들을 피로서 물리치지 않았고 성지를 완전정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그것으로 프리드리히2세는 다시 한번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확인하고야 만 셈이였다.
프리드리히2세는 비통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로마교황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너무나 슬프고 외롭다. 교황은 양의 탈을 쓴 늑대다. 탐욕에 눈이 멀어 있다." 라고...
아무튼 그 협약으로 유럽의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은 예루살렘에서 평화적인 공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십년후 당시 아랍권 맹주였던 협상 당사자 알카밀이 죽자 협약은 파기되고 다시 불화와
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2세는 괴로와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알카밀이 죽고
몇년후 프리드리히2세도 죽었다.
두 지도자가 죽은 후 관을 열어보니 서로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들이 빼곡히 들어있었고 오늘에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전해진다. 특히, 프리드리히2세의 관에서는 모든 문양과 글씨들이 아랍어로
쒸어져 친구 알카밀에게 보내는 미사여구의 찬사와 사죄의 마음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프리드리히2세는 아랍어로
"친구여! 위대한 자여! 정직한 자여! 지혜로운 자여! 승리자여!"
라고 쒸어진 수의를 입고 지난 800년을 친구 알카밀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관 속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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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밀과 프리드리히2세가 친할 수 있었던 것은 프리드리히2세가 아랍어에 능통했고 아랍문화에
조예가 깊은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아랍어 친필 편지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오랜
앙숙관계의 지도자들을 상호 절친(일명 베플)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이후 놀랍게도 독일
에는 많은 오래된 성당에서 아랍문양과 신화가 그려진 벽화나 천정을 볼 수 있다.
2003년 네덜란드에서 그리 멀지않은 독일 Aachen의 한 성당에 들렀을 때 돔 천장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신이 나체로 앉아 있는 장면이 타일로 그려져 있었고 아랍어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치 두 강의 신이 천지창조와 같은 장면을 묘사하듯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로마교황은 십자군전쟁을 일으켰고 굳이 무력으로 이슬람을 정복하기 원했을까?
(프리드리히2세의 파문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로마교황청은 유럽의 제국에게 기독교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사치와 탐욕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때였다. 일부 회의를 품는 나라를 본때도 보여줄겸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기강을
세우는 한편 동방무역을 가로막는 이슬람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으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의 십자군이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자 로마교황의 친위대인 템플턴의 기사들은
제일 먼저 입성하여 성소와 이슬람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황금과 재물을 약탈하여 교황에게 바쳤다.
이것은 엄연히 기록되어 내려오는 역사이고 진실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것을 가끔씩 '다빈치코드'라는 추리소설이나 영화로 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보지 않은 케이블TV 히스토리채널에서나 드물게 볼 뿐이다.
우리의 EBS도 그것을 인용하는 정도다.
지난 2001년 로마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처음으로 이슬람 땅을 밟고 키스를 하며 이슬람 형제들
에게 그간의 도발에 사과하며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그 진정성이 온 기독교인에게 확실히 전해져 천년을 묵어온 그 앙금이 해소되고 상호 형제애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지구의 평화를 위해.
PS : 하기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블로거에서 프리드리히2세 편을 보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슴
http://kr.blog.yahoo.com/yydeokk196/9205 (프리드리히2세 관련)
http://kr.blog.yahoo.com/yydeokk196/14896 (십자군전쟁 관련)
End
ps : 지난주 노르웨이에서 폭탄테러와 무차별 총격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빅도 삐뚤어진 인종차별관과 종교관으로 스스로를 옛 교황의 친위대
템플턴 기사단을 자처했는데 아직도 이런 종교적인 편견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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