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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돌아댕기기)

아.... 내성천

by 홀쭉이 2011. 11. 21.

시간이 없어 뛰엄뛰엄....   아직 작성중임다. (특히 사진)

 

아...  내성천(乃城川)2011.11.19(토)~20(일)

 

1.

 

 

   내성천.  기수형님이 먹황새를 쫒아 지난 3년 동안 경북 예천와 영주 일대의 내성천을 다녔지만 지난 주에 스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모래평강(平江)으로서의 진면목을 발견했단다.  그리고 울나라 대표적 모래강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4대강사업으로 망가져 가는 모습에 비통해하며 흥분을 했다.  하여 스님이 추진하는 내성천트러스트에 가입하고 우리의 올 가을 회동은 내성천으로 하잔다. 

 

  시킨대로 운동본부 홈페이지로 들어가 오만원을 내고 내성천 일대 어딘가에 땅 한평을 사고 토요일 아침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니 부산친구들은 벌써 도착해 기다렸다.  점심 때가 되었지만 스님이 기다린다 하여 냉큼 예천으로 향했다.

 

  기대 반 걱정 반... 스님은 작고 여위었지만 강단있고 총기있어 보였다.예전 천성산 시절부터의 이야기로 먼저 인사를 했지만 스님에게 너무 크고 깊은 상처라 눈치가 보였다.  통성명도 필요없고 서울과 부산에서 왔지만 스님 처소에 들어가 차 한잔 마실 겨를도 없이 내성천으로 나갔다.  이후 우리 차에 올라 탄 그때부터 스님은 내성천 일대의 지리는 물론 역사, 문화, 예술과 골속골속 마을사람들의 삶까지도 훤히 알고 안내하는 특급 내성천 가이드였다.

 

스님 거처동네에서 내성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도 모래내였다. 숱한 동물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내성천은 평평한 모래강으로 발목까지 오는 깊이로 금빛 비늘이 여울지는 것 같았다.

 

 

 

 오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내성천 강변에서 겨울의 초입에 제법 싸늘한데도 스님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강속으로 성큼 성큼 들어서니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운 모래살결을 느끼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성천으로 연결되는 작은 모래천에는 논고동과 다슬기가 여기 저기 길다란 길을 만들며 올라가고 있었다.  드러난 모래 위로는 고라니와 수달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스님은 내성천 연결부위 한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한무더기의 수달 똥을 보여주었다.

 

 물가로 나가니 두 가닥 댕기가 선연한 댕기물떼새가 무리지어 있었다.  족히 30여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멀리 강 언덕에는 황조롱이 두 마리가 유희의 쫒고 쫒김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큰 말똥가리가 숲으로 날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강이 워낙 깨끗해서 숨을 곳이 없어서인지 새들이 적었다.  그것 쯤이야...

 

 그것으로 시작하여 내성천의 상류로 강길로만 달려 강의 진면모를 골속 골속 보았다.들과 마을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고 50km가 넘는 굽이 굽이 강길을 따라가니 울나라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모래강의 비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영주댐 현장의 억장무너지는 공사장면도 보고...   속도전을 하는지 어둑어둑해지는 현장에는 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굴삭기와 트럭들은 굉음을 내며 골짜기를 울리고 있었다.  근데 댐위로 1km 남짓 올라가자 또 다른 수중보가 건설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수중보가 건설되고 있었다.  왜일까?  스님은 내성천이 워낙 모래강인지라 모래가 댐을 메워버리니 상류 중간 중간에 수중보로 모래가 하류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억지에 억지를 더하여 심심산골의 마을과 유적들을 수몰시키고 모래강의 비경을 망가뜨려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고 있었다.  지난 여름 큰 비가 온 후 상류에서 모래공급이 차단되니 하류의 모래강은 바로 침식이 시작되어 자갈같은 거친 바닥이 드러났고 구미에 이르러서는 와류로 인해 강둑도 무너져 마을과 농토가 침수되었다 한다.

 

 그 모래강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또한 여태까지 몰랐고 못와봤슴에 부끄럽고 처참한 공사현장과 모래를 준설하여 바닥이 드러난 커다란 상처에 가슴 아팠다.  대체 이 대역죄를 어떻할지.  스님은 울분을 삭이고 차분하게 얘기했지만 우리 셋은 머리 속으로 4대강사업 주역들을 잔인하게 응징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아...

 

 모래강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평평한 모래강은 엊그제 내린 비로 수량(水量)이 제법 있어도 소리가 없었다.  스며들듯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지 않을지.  아니 그 엄청난 상처와 수몰의 공포 속에 소리없이 흐느끼고나 있지 않을지... 

 

 차안에서 스님은 겨울철에 사냥꾼들이 산짐승들을 총으로 쏘아 잡아가면 동네 노인들이 몇일간 산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   평소 유순했던 산짐승들이 부모자식을 잃고 사나워져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잎이나 가지가 꺾인 상처 많은 나무의 가시가 더욱 날카롭고 단단해진단다.  이미 천성산에서 너무도 큰 상처를 겪은 스님의 한맺힌 동병상련인지...  그리고 스님은 자신의 한을 풀기보다는 저 흐르는 물과 같이 품어주고 베풀어주는 생명수로서 도의 경지로 용맹정진하고 있지나 않을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그노래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아마 저 버드나무 속에는 새의 둥지가 있을 것같다.

 

 

 

 스님은 먼데서 온 우리를 배려하여 강길을 따라 가며 유서깊은 서원과 고택에 잠시 들러 운치있는 설명도 해주었다.  그렇게 모래강을 따라 금광교에 이르러 어두워져 더 이상 강길 탐사가 어렵게 되었다.  수려한 금광교 위에서 강 아래의 먹황새를 망원경으로 찾다 지쳐 노을지는 모래강을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고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물돌이동인 무섬리(水島里)에 잠시 들러 고택들을 휘휘 둘러보고는 다리를 건너 저녁식사 장소를 찾았다.  마침 스님과 친분이 있는 통나무집 식당에 들러 털보주인의 7080 노래를 라이브로 들으며 막걸리 한잔과 함께 요기를 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나와서는 오염없이 맑은 그곳 하늘의 별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스님은 머리 위로 한복판에서 사다리꼴로 반짝이는 페가수스 자리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스님과의 반나절이 불편도 할만했지만 스님이 워낙 소탈하고 배려가 깊어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염체불구하고 스님거처로 같이 따라가 차를 마시며 내일 일정을 정하며 다시 천성산과 내성천 이야기를 들었다.  어두워져서야 온 스님거처는 20여 가구가 있는 마을의 한 가운데 있었는데 사랑방도 있고 자그만 문간방도 있는 아담한 여느 농부의 집.  농기구가 쓰던 그대로 걸려있었고 마당에는 채마밭도 있었다.  지인들이 잠시 빌려준 집이란다.  11시가 되도록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얘기를 나누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여 우리에게 안방을 내주고 구석구석 따뜻하게 보살펴주고는 옆방으로 가서 잠시간의 잠을 청했다.  친구들과 나는 간밤에 차를 많이 마셔 오줌이 자주 마려웠고 간만에 시골방에서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정작 잠자리를 유난히도 가리는 까탈스런(?) 기수형님은 코까지 골아가며 단잠을 잤다.  이 무슨 인연?

 

2.

 

 도무지 오줌을 참을 수 없어 일어난 아침 여섯시.방문을 열고 나가자 쨍하면서 싸늘한 냉기가 머리끝부터 온몸을 휘감았다.스님방은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가 일어나길 기다렸던 모양이였다.장비를 챙겨 수달을 보러 강가로 나갔다.   밤새 온 강을 휘젖고 다닌 그놈들은 모래강에 어지러운 발자국들만 남기고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30여분을 추위에 벌벌 떨며 기다리다 강길을 따라 내려가 회룡포로 갔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타원형의 물돌이는 장관이였다.   언덕 위는 마치 패션모델의 잘록한 허리처럼 가늘고 위태로웠다.  회룡포는 천하의 고립지로 예전의 논밭을 어줍잖은 공원과 펜션으로 만들어 이방인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모두들 지자체의 근시안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행정에 혀를 끌끌 찼다.  마을에 차를 세워두고 모래강을 걷다 새로 만든 철제 섶다리를 건너 반대편까지 가보았다.  준설한 두터운 모래 아래로 거친 돌들이 드러났고 평평한 강을 깎아 깊이 침식된 흔적이 보였다.  돌이 드러난 강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분명 흐느낌과 분노의 소리일 것이다.

 

 다시 거처로 돌아와 스님은 마당의 어린 아욱잎을 따서 아욱된장국을 뚝딱 끓여 내왔다.  동네 어른들이 준 배추김치와 무우김치 그리고 짠지 같은 절임에 흰쌀밥을 두 그릇씩이나 비웠다.  후식으로 누룽지가 걸쭉한 숭늉까지.  예전 큰 절에서 5년간 공양주를 지낸 경력의 솜씨였다.  초파일에는 3천명분의 밥도 지었다고 했다.

 

 다시 거처를 나와 어제 못다본 상류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스님의 소개로 영주읍의 순흥기지떡방에 들러 찰떡과 술떡을 잔득 사서 점심을 대신했다. 

 

50km가 넘게 상류로 올라갔는데도 강폭은 좁아지지 않고 여전히 널찍한 모래평강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저곳 언덕이 원앙새 새끼가 부화하여 에미를 따라 물로 비오듯 떨어졌다는 곳이다. 

모처럼 카메라를 안가져갔더니 내사진이 많다. 발바닥에 전해오는 모래촉감이 좋았다.  여름철에는 오죽하겠는지...

 

 

저 수려한 모래강과 마을이 모두 수몰된다니... 금광교 아래 드러난 모래 위로 고라니와 수달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있다.

이미 저리도 생명이 왕성한데 뭘 살리겠다는 건지...  수몰시켜 죽이기나 하면서 말이다.

 

마치 사막에 흐르는 와디같은 모래강이였다.

 

멀리 강가에 보이는 것들은 오래전에 심은 왕버들이 줄지어 있다.  뒤로는 승가산이다.

 

 

제발 모두 이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님은 그곳 일대를 자전거로 도보로 얼마나 누비고 다녔는지 손금보듯 훤히 크고 작은 길 이 다리 저 다리를 건너 우리를 고운 모래강이 가장 잘 보이도록 강길로만 안내를 했다.  이윽고 도착한 어제 본 그곳부터가 운포구곡(雲浦九谷)의 시작이란다.  얼마나 더 좋은 비경을 보여줄려고...   금광교를 지나 굽이 굽이 강길과 마을을 지나 강가의 비경이 있는 선몽대(仙夢臺)에도 들러 사진을 찍었다.  댐으로 수몰되는 상류지점에는 옛 선조들이 제방보호와 그늘쉼터를 위해 심었던 왕버들이 고목이 되어 줄지어 서 있었다. 

 

 상류로 가는 중간에 스님의 배려로  자그만 서원도 두개나 보고 위세있는 고택(괴헌/명헌)도 두 군데나 들렀다.  더 이상 차길이 없는 지점의 강에 차를 세우고 스님과 나는 3년후 수몰이 되는 동네 근처의 모래강으로 신발을 벗고 내려가 다시 한번 그 보드라운 모래에 살결을 부볐다.  맑고 차가운 물결은 발가락 사이사이 모래를 훓어가고 모래는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평평한 모래강에서 얕은 물길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마음대로 가닥을 만들어 흩어지고 다시 만나고 투명한 햇살이 부서져 눈부시게 반사됐다. 

 

 스님은 지금 하는 일을 일로서 얘기했다.  마치 우리의 생업처럼...  그래서 한 철에 반짝하는 시위나행사가 아닌 것이다.  생명과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은 스님의일이 된 것이다.  2013년 내성천 수계의 댐과 보가 완공되면 물채우기에 1년 이상이 걸리는 것까지계산하여 어떻게 지속적으로 사업을 벌여나갈 것인지 담담하고도 실질적인 계획이 서 있었다.

  

 

 인제 다시 하류로 어제 간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다.인생의 멘토이자 1박2일 여정의 특급 가이드였던 스님을 거처로 다시 모셔드리고 작별인사를 했다.  간단한 작별 그리고 긴 여운.  스님은 하류로 가는 길에 내성천이 산양에서 내려오는 금천과 안동에서 내려오는 낙동강 본류와 만나는 삼강(三江)의 주막에 들러 모처럼 만난 우리들의 회포를 풀라고 소개까지 해주었다.  인근 지자체가 뱃길의 요충지였던 그곳에 옛 주막을 흉내내어 뱃사공이 아닌 관광객들에게 술을 팔고 있었다.  막걸리 한 되에 손두부와 묵 그리고 배추전을 안주삼아 먹고 잔치국수로 늦은 점심겸 저녁을 해결했다. 

 

 다시 대구로 가기 위해 중앙고속도로에 차를 얹었다.  어둑어둑 해지는 초저녁 무렵 우리의 1박2일이 끝나기가 아쉬웠는지 산과 숲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은 또 한번 어릴 적 신비를 자극했고 마지막 남은 썰까지 풀게 했다.  중앙고속도로는 때 아니게 차가 밀려 김천으로 나와 서울행 기차를 잡았다.  그렇게 내성천만으로 1박2일을 온전히 보낼 수 있었던 2011년 겨울 초입의 주말이였다.

 

kw

 

PS : 이건 내 휴대폰 사진들

 

 발이 시렸는데도 스님은 거침없이 성큼 성큼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억새와 갈대가 어우러진 강변

 

 

여기가 선몽대란다. 아마 강가에서 선비들이 놀았던 것같다. 

 

 

이것이 평상시의 강의 모습이다.

 

 

강과 산너머로 해가 뉘었뉘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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