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령원과 보광사 어실각과 향나무
2019.11. 10
조선 초기 태평성대(太平聖代)라면 태종과 세종 치세
조선 후기에는 영조와 정조 치세라 할 것이다.
이 두 시기 왕들의 공통점이 있다.
선대(先代)가 강력한 바람막이를 한 것이다.
아다시피 조선 초 태종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역성혁명의 주역이고 개국 후에도 반대파(주로 고려말 유신) 제거 및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일으켜 분란의 싻을 제거하고 강력한 왕권을 세웠다. 3남인 아들 세종에게 양위를 했어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태종은 병권(兵權)을 놓지 않고 어린 세종을 넘보는 세력을 견제했고 밖으로는 명나라의 간섭을 막고 왜구의 침략에 쐐기를 박는 대마도 정벌도 했다.
영조(1694~1776, 82세 졸)는 30세에 즉위했지만 후궁인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나 선대 숙종의 서차자로 정통성 시비가 있었다. 유년시절 궐밖에서 살다가 입궁하였고 이복 형 경종이 병약하여 졸지에 왕세제로 책봉되자 나이 많은 중신과 반대파(소론)로부터 많은 고초를 겪었다. 암튼 경종의 갑작스런 서거로 즉위하고 조선의 최장수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52년 1724~1776)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인지라 영조의 나이가 60세 정도가 되니 조정 대신들이 아들뻘로 바뀌었다. 나중에 팔순에 접어들자 손자뻘이 많았다. 아들 사도세자가 할 치세까지도 혼자서 다 해버린 셈이다. 그러니 초기에 중신들에게 끌려 다녔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 신하들이 입바른 소리를 할라치면 "너거 아부지가 예전에...." 나중엔 "너거 할베가 예전에...." 이랬으니 신하들이 영조 앞에서 설설 기어 다녔지 않았겠는지.
그런 강력한 영조의 후광으로 즉위한 정조는 나름 개혁군주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즉위 첫날 정조는 말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는 곧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일파에겐 파바람의 선전포고...
그래서 조정 중신들의 거센 반발과 위협 속에서도 수원의 사도세자묘(융건릉) 참배를 강행했다. (정조행차)
약점 잡힌 중신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학파 정약용이나 박지원, 이득무, 유득공,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를 등용하는 등 탕평책을 이어나가 많은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가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이 있다.
왕위와 상관이 없었던 시절 효심이 깊었던 어린 영조는 시묘를 했지만 나중에 왕세제가 되고 왕이 되어서는 어머니의 묘소를 갈 수 없었다. 후궁 출신 어머니이기에 신하들의 눈총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 이름도 초기엔 <숙빈묘>로 부르다가 영조 재위 20년에 이르러 <소령묘>로 그리고 재위 29년에 이르러 왕의 사친으로 <소령원>이 되었고 왕족에 준하여 홍살문도 만들고 문인석도 세우고 봉분을 크게 단장했다.
경기도 파주 광탄면 소령원
그리고 소령원에서 멀지 않은 고령산 중턱에 신라고찰 보광사가 있다.
그 보광사에는 대웅전 우측에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어패를 모신 <어실각>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영조가 심었다는 수령 3백년이 넘는 향나무가 있다.
후궁 출신의 어머니를 참배하고 모시지 못함을 서러워하여 소령원이 내려다 보이는 보광사 어실각에 어머니의 혼백을 모시고 자신의 분신으로 그 향나무가 어머니를 돌보도록 하였다.
후궁 시절 그 숱한 시기와 모함 속에서 어린 연잉군 영조를 지켜내다 돌아가신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였단다.
보광사 입구와 대웅전
보광사 어실각과 향나무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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