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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러니(신변잡기)

맹사성과 황희

by 홀쭉이 2019. 11. 3.

맹사성과 황희


2019.11. 3


지난 주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에 갔다가 부근의 고불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에 들렀다.

유서깊은 고택과 노거수 은행나무가 얼마나 고운 단풍으로 맞이할까 설레는 가슴을 안고서..

고택 앞에는 자그만 주차장과 그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까지 있었다.


역시 거기 가지 않으면 알 수없는 역사가 있었다.

맹사성(1360~1438)과 황희(1364~1452)는 고려말 유신으로 조선 초까지 장수한 명재상.

두 왕조에서 벼슬을 하고 역적에서 충신으로 거듭나고 최고의 관직에 올라 당시로선 드물게 천수를 누린 두 분.


특히, 맹사성은 아버지 맹희도(고려말 정승)가 이색, 권근, 최영, 정몽주 등

당대 최고의 실세와의 친분 속에 유학자로 자랐다. (고려말 과거 장원급제)

어린 시절 아버지 친구인 권근의 문하생(제자)이 되어 사숙했고 나중에 최영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하여 온건개혁파의 부류에서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내놓고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으려 칩거했다.

하지만 조선의 개국과 함께 화합의 명분으로 온갖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관직을 맡았고 마음에 내끼지 않았던

그는 고려말 유신들(주로 두문동 72현)과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정벌해달라는 요청서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참형을 당할 위기...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여러 친구들이 그를 겨우 죽음에서 구했단다. (요런 건 일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맹씨행단의 고불 박물관에서나 이런 기록이 나온다.)


맹사성의 평소 행동거지와 태도는 유명하다.


남루할 정도로 소탈한 복장에

말 대신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불고

손님을 후대하여 항상 상석에 앉히고

아래 사람에게 공대하고

자식에겐 절을 하며 술을 가르치고


황희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광덕산의 두문동으로 들어갔지만 태종이 온갖 회류와 협박(실제 불을 질러 모두 죽이려고도 했슴)에 못이겨 당시 어린 나이의 황희를 내보내 타협을 했다는 미확인 이야기가 있다. 하여 그가 조선의 조정에 들어가 행동거지는 개국공신들의 눈총 속에 가시밭길이었다.


하여 마찬가지로 '황희'의 행동거지도 맹사성과 다르지 않다.

'황소'와 '흑소' 이야기

'바보 부인' 이야기

논쟁에서 '김 가도 옳고 박 가도 옳다'


조선을 통틀어 가장 청백리(淸白吏)로 불렸던 두 분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처세술(處世術)이다.

조선 초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 2천 명이 넘는 개국공신들의 서슬 시퍼른 입김 속에 버텨낸 무기가 그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대면 죽음이다>

수 차례 사표를 내고 관직을 마다했던 것도 행여 그들 눈에 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였을지...

하여 그 두 분은 최고의 관직을 마칠 때까지 어떤 파벌이나 수족을 만들지 않았고 조용히 낙향하여 여생을 마감했다.

낙향해서도 서당을 열거나 문하생을 두지도 않았고 그냥 조용히 숨죽이며 살다 천수를 다했다.

황희는 행여 공신일파에게 오해를 살까봐 고향인 개성으로 낙향하지도 못하고 파주(문산)의 임진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을 지어 강너머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었다.

관직을 떠나서도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개성에 갔다가 그 쪽 토호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밀 것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였을까.)


물론 능력이 출중하니 그런 고위 관직을 하고 혁혁한 업적을 남겼겠지만

두 왕조에서 다섯 왕을 섬기며 역적에서 충신으로 최고 관직에 오르며 청백리

게다가 당시로선 드물게 88세와 78세의 천수를 누린...


아무튼 그런 연고인지 타고난 인품이었는지 두 분은 우리의 역사에서 '청렴결백'과 '청백리'의 상징적 인물이다.


'알아 무엇하리요'의 역사와 '알아서 재미있고' 당시 실제 역사에 더욱 근접하여 실체에 다가가는 그래서 확장성이 있는' 역사가 여행과 발견의 묘미다.


KW


PS. 더 재미있는 잡설

1) 두 분이 몇 년 더 살다 나중에 세조가 찬탈하는 계유정난(1453년)에 말려들지 않은 것도 그들의 타고난 복이다. 맹사성이 병조판서직에서 물러나며 천거한 김종서는 조선왕조에서 무인으로 유일하게 영의정이 되었지만 세조의 찬탈 과정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2)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황희는 명 태조(주원장)가 등극하여 전 왕조(송)에서 재상이 실권을 쥐고 반란을 일으키기 쉽다는 이유로 재상제를 폐지하자 그 영향을 염려한 조선은 고려 말에서 넘어온 황희는 그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물임을 주장하여 조선에 재상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차라리 혈기방장한 2천 여명의 개국공신이라면 몰라도 고려 말 유신으로 조용히 숨만 쉬고 사는 황희는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명나라에게 주장했던 것이다. 

3) 황희는 조선 초 주로 사법과 행정을 담당하고 맹사성은 주로 군사와 예악과 기술 업무를 담당했다. 딱딱한 사무처리는 황희가 글고 좀 재미를 더하는 일은 맹사성이 처리했다. 조선 초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두 분을 좌청룡 우백호로 중용한 것도 그들의 출중한 능력과 인품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적어도 고려 말까지 중신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왕권을 위협하며 대드는 일없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냐는 생각이다.


외암리(예안 이씨 종택)_1 (아산)

외암리(예안 이씨 종택)_2 (아산)

맹씨행단(맹사성)_1 (아산)

맹씨행단(맹사성)_2 (아산)

반구정(황희)_1 (파주 임진강변)

반구정(황희)_2 (파주 임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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