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초기에 북한군이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하고도 서울에서 3일 간 남하를 멈춘 이유는 춘천과 홍천 일대의 국군 6사단이 북한군 정예부대 2사단과 12사단의 대공세를 잘 막아내 지체시킨 것이었다.
다행이 6사단은 평소 철저한 전술훈련과 방어태세 글고 개전 즈음하여 휴가 장병이 별로 없어 T-34 탱크로 무장한 압도적인 화력의 북한군에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북한군 전력 손실 40%) 하여 북한군은 춘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그곳을 점령한 부대와 합세하여 한강 도하와 남하를 하려던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군 지원과 작전을 지휘한 쏘련 지도부에선 김일성에 노발대발하며 전쟁 중인 북한군 군단장과 사단장급에 대대적인 문책을 했다.)
그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전투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후퇴 중에도 북한군에게 조직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후 방어전에서도 자연스레 미군은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6사단을 중심으로 국군이 주체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다 1.4후퇴 이후 38선 부근의 현리전투에서 국군3군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대패를 당하고 군기강까지 무너지며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사실 중공군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최고 지휘관부터 도망쳐 부대가 흩어져 버린 것에 노발대발한 당시 미군 사령부는 국군3군단장(유재홍)과 예하 지휘관의 비겁과 무책임을 목격하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박탈을 요청하고 이승만은 승인했다. 그렇게 전시작전권은 미군으로 넘어갔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전체 전쟁지휘권이 명군으로 넘어갔다. 육전이야 명군이 강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해전에선 달랐다. 당시 명군 수군도독인 '진린(陳璘)'은 이미 이순신 장군의 연승을 알고 있었고 이순신의 잘 정비된 함대를 시찰하고는 일체 간섭이나 지휘권도 행사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오히려 장수로서 존경심을 품었고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 장군을 칭송하는 보고를 올려 임란 중에 명 황제는 이순신 장군에게 각 가지 선물과 함께 조선의 최고직위를 하사했고 명나라 귀화를 권유하기도 했다. 나중에 명나라가 망하자 진린의 후손은 조선에 귀화했고 오늘날 한국에서 광동 진(陳)씨의 조상이 되었다.
명나라나 미군이나 처음부터 우리의 군사지휘권을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들은 원군으로서 동맹국과 힘을 합쳐 침략군을 패퇴시키려 했다. 하지만 선조와 중신들이 엎드려 간청하여 원군을 요청하고 전투참여를 독려하였으니 이미 작전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주권조차 내주는 행태였다. 하지만 힘은 부족하지만 죽기를 각오하며 자신을 지키려할 때는 그것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간섭만 하고 지원을 하는 편이었다.
6.25 당시에도 아군 6사단이 훌륭한 전과와 임전태세를 갖추자 미군은 국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다가 한참 지나 현리전투에서 국군 3군단이 패주하며 자신을 포기하는 듯한 군기강 해이를 목도하고 작전권을 뺏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순서로 보인다. 결국 지금도 미군으로부터 작전권회수는 바로 우리의 결기 즉, 우리는 우리가 목숨걸고 지킨다는 굳센 의지의 발로라고 간주할 것이다. KW
https://www.youtube.com/watch?v=NkrwUkuY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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