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Serious (별명)
2010. 1. 14(목)
올해 고3이 되는 우리집 큰애가 영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당시 큰애는 유치원에 다니다 현지 초등학교를 들어가 모든 것을 영국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던 시절 어느날 내게 불쑥 그렇게 불렀다.
순진한 꼬맹이가 아빠에게 붙여준 (첫인상에 별로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인해 무안도 하고 화도 나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조금 지나면서 내가 왜 큰딸에게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었는지 짜증스런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빠는 매사에 너무 심각하고 인상이 찌푸려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아빠의 페이스로 심각 혹은 진지한 상황으로 몰고가버린다는 것이다.
별 할말이 없었다. 7살짜리 꼬맹이 눈에도 편견없는 관찰이자 지적이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의 ‘심각증’이 대인관계를 해치는 콤플렉스 정도로 여겨 경계를 했다.
내주변을 살펴보니 정말이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버릇이나 취향이 있었던 것같다.
여유로운 농담이나 가벼운 우스개를 별로 탐탁찮게 여겼고 진지한 표정이 아닌 언행을 가소롭게 생각했다.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에서도 중후한 것들을 편애하여 가벼운 기교나 메시지를 멀리했다. 주변사람들과의 만남이나 회의에서도 내가 발언할 기회만 되면 분위기가 싸늘했다. (아마 내가 습관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버릇에도 기인할 것이다.)
한때 영화 ‘볼프강 아마데우스’를 보고 모짜르트의 천재적인 광기로 인한 촐랑거림, 즉흥성, 무질서한 생활을 알고는 그의 음악이 싫어지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피카소의 실험적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난잡하고 무절제한 생활로 함부로 그리고 내보이는 작품에서 그의 예술혼이나 천재성 이전에 그의 경박함으로 나는 미리 벽을 쌓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그의 진가를 알고 후회는 했지만… 적어도 그땐 그랬다. 소설이나 시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삶의 고뇌에서 나온 진지함을 바탕으로한 희노애락의 표현이라야만 소설이고 시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인 클래식의 신봉자였던 것같다.
하지만 그 심각함이 콤플렉스가 된 이후 가능한 가벼운 대화나 농담을 통한 대인관계 회복과 긍정적 사고를 위해 나름 노력을 한 것같다. 그래서 더러 나의 바뀐 면모에 대한 멘트를 들을 때면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 심각증에 대한 의문과 애착을 갖게 된다. 대체 내가 하는 일과 대인관계 그리고 인생전반에 걸쳐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다면 어떤 깊이와 성취가 있을 것인지? 다만 대인관계를 위하여 지나치게 심각해 보이지 않는 기술을 익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원래 습관이나 취향대로 엄청나게 진지하고 심각하게 모든 일을 하고 다만 그걸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제사 알아차린 셈이다. 요즘은 “Mr. Serious”를 별명으로 인터넷에서 댓글을 달 정도로 친근해지고 있다.
반갑다!!! 칭구야!!!
2호선 전철로 출근하는 아침에…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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