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 새가 없는 세상은 인간도 없다.
  • 세상만사 균형이고 조화다.
탈고안될 전설

경림

by 홀쭉이 2012. 7. 7.

경림

 

2012.7.7(토)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식구는 대학2년생 경림이다.

그런 경림이가 대견스럽고 부럽기까지 하다.

 

비교적 스케줄이 적은 토요일에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몸매 관리를 위해 방바닥에 매트를 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요가를 한시간 반 정도나 했다.  그리곤 샤워를 하고 가벼운 점심을 챙겨먹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문 앞을 나서며 오늘 저녁엔 동아리 선배와 저녁을 같이 하기 위해 알바 마치고 그곳으로 바로 가겠다고 한다.  아마 밤 열시가 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에야 경림이의 분주한 일상을 보면 새삼 가슴 벅차고 설렌다.

공부도 열심히 하여 나쁘지 않은 성적과 여러 선후배와 잘 어울리는 학과생활.

두 개의 이질적인 동아리 활동도 꽤 적극적이고 주 4회의 알바로 엄마.아빠 선물과 동생 용돈까지 챙겨주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한 턱 쏘는 후덕함.   

연애도 적극적인 편.  놀기도 잘 한다.  게다가 술도 잘 마시고... (웬만한 주당이 붙어도 해볼만 한 정도란다.)

 

생활패턴과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하다.  거침이 없다.  정렬적이다.

 

우리가 네덜란드로 나가기 전 경림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한자가 어려워 힘들어 했는데 내가 우회적으로 자극을 하며 몇 가지를 가르쳤더니 도움이 되었는지 다음 시험에서는 반드시 백점을 맞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몇 개를 틀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돌아왔다.  못난 자신이 미워 죽겠다며 못쓰는 볼펜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는 볼펜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넌 못난 경림이야!"  

하며 볼펜을 바닥에 획 내 팽개쳤다.  그리고는 다가가 발로 난폭하게 밟아 볼펜이 산산 조각이 날 때까지 밟아대며 화풀이를 했다.  얼마나 귀엽고 대견스러웠는지.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시험에서는 자랑스레 백점을 맞은 한자 시험지를 내놓았다.

 

네덜란드에서도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잊어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곳 중학교 격에 해당하는 ISSI에 다닐 때였다.  그때가 시험기간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피아노를 쳤는데 소리가 별로였다.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거칠게 피아노를 치고 두드리며 저녁 늦게까지 계속 같은 곡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화난 목소리로 욕도 뱉아 가며 말이다.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거의 다음 날 아침이 되도록 계속 했다.  그제서야 다소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도 아침에 일어나 시험기간중 피아노에 그렇게 오랜 동안 매달린 것에 대한 잔소리는 했지만 돌아서 얼마나 대견스러웠던지...

 

경림이가 ISSI에서 일종의 학예발표회를 준비하며 생긴 일화다.

경림이는 무슨 뮤지컬을 하기 위해 분장을 하고 노래와 대사를 외웠다.

그리고 뮤지컬 홍보를 위해 포스터를 그린다고 오후부터 스케치를 하고 색칠을 하며 혼자 그것에 몰입해 있었다.

그럭 저럭 밤이 깊어 다른 가족들은 그런 경림이를 두고 윗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려는데 경림이가 아랫 층 거실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포스터를 그리던 도구들이 어지러히 널려 있고...  잘 그려진 포스터가 석 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썩 잘 그려진 작품이었다.  그 날 경림이가 그려간 포스터는 ISSI와 아인트호벤 인근에 붙어 학예발표회의 뮤지컬을 소개했다.  경림이는 선생님들로부터 큰 칭찬과 함께 상금 3유로를 받아 왔다.  경림이가 도시락을 두고 가서 내가 학교에 가져다 주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교의 많은 교사들이 경림이를 알고 있었고 모두 다가와 인사를 했다.

 

경림이가 그곳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국제학교 RIS에 다닐 때 좋아했던 남자애가 있었다.  벨기에 출신이었는데 학교 바자회에 가서 본 그 애는 키 크고 잘 생긴 그리고 아주 얌전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엄마와 아빠도 젊잖아 보이는...  우린 학교 모임에서 서로 눈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다.  경림이의 그런 내색에도 남자 애가 워낙 얌전해선지 중학교인 ISSI로 진학하면서 둘 사이가 흐지 부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경림이는 그때 열 세살의 나이에 우리에게 섬뜩한(?) 그러나 재미있는 말을 했다.  경림인 상기되어 얼굴에 홍조를 띄며 말했다.

"인젠...  엄마.아빠는 없어도 그 애 없인 못 살 것 같아요."

 

그랬던 경림이 그 남자애가 벨기에로 돌아가 버리고 ISSI로 진학하여 또 다른 남자 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 정도.  그 애는 키도 적당하고 잘 생긴 일본 남자 아이.  학교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를 도맡아 하고 축구와 달리기 등 스포츠에도 능하고 공부도 썩 잘 하는 편.  마찬가지로 젊잖고 얌전한...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여자 애들이 많았단다.  하지만 경림이가 그애를 좋아 하는 것이 유난했던지 다른 애들이 둘 사이를 놀리기도 했다.  경림이가 그 애 없이 아인트호벤 시내에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친구들이 짓궂게 놀리더란다.

"Iris.  What are you doing alone here without your loverboy?"    

 

그곳에서 겨울방학이 되어 오스트리아로 일주일간 스키캠프를 가기로 했다.

경림인 무척이나 흥분되어 몇 일전부터 엄마와 시장에 나가 파티에서 입을 옷과 신발 및 치장물을 사와 준비했다.

한국의 또래에 비하면 다소 조숙하다할 도발적인 복장과 굽높은 하이힐...

뭔가 했더니 스키캠프 기간중 매일 밤 어설픈 나이트 클럽같은 분위기에서 학생들이 춤을 춘단다.

경림인 거기서 그 일본 남자애한테 유혹의 애정공세를 퍼 부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애는 끝까지 젊잖은 기품을 유지하며 경림이의 공세를 이겨냈다.  아마 경림이가 듣기에 서운한 말도 한 것 같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윽고 광란의 일주일이 지나고 오스트리아에서 버스로 네덜란드로 돌아오는데 도착 시간이 밤 10시 경.

가족들을 차에 태우고 학교에 나가 경림이를 맞이 하는데...  미쳐 잘 놀았냐고 물어 보기도 전에 경림이는 내게 달려와 얼굴을 뭍고 엉엉 울어댔다. 

"다 큰 애가 엄마.아빠 못 본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며 어깨를 두드리는데 우는 모습이 심상 찮았다.  가슴을 들썩이며 꺼이 꺼이 우는데 얼굴을 세워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중에 제 엄마한테 들었는데 그 일본 남자 애 한테서 퇴짜를 맞은 거란다.  그래서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거라고...

 

시간이 지나 우리가 그 일본 애를 들먹이며 놀려대면 경림이는 애써 냉담하게 무관심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더 이상 관계 짓지 말아 달라고 신경질적으로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 애가 일본으로 돌아가 지금은 어디 명문대학의 무슨 과를 다니고 있다는 얘길 언듯 하고야 말았다. ㅎㅎㅎ

 

그런 성정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했다.

질풍노도의 중.고생활, 입시지옥을 지나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토록 어려워 했던 수학과 국어도 머리를 찧고 울고 불고 하여 2등급의 성적으로 기대를 충족시켰다.

미련이 남은 주변 친구들은 재수를 한다 외국 유학을 간다 법석을 떨었지만 경림이는 쿨하게 이미 정한 학교와 전공에 지원하고 입학하여 그 이후로 그런 입시공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 생긴 동아리 선배 남자 친구와 열애.  지켜보는 우리가 뜨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너무 뜨거운 교재가 힘겨웠는지 헤어졌다.  한동안 몸이 아프고 수척해졌지만 경림이는 머리를 상큼하게 단발로 자르고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Welcome back!!!"

 

 머리를 자르기 전

 

 

머리를 자른 후

 

친구와 여의도 벗꽃 구경을 가서

 

 

알바로 월급 타 한턱 쏜다며 우릴 데리고 나갔다.

 

 

 

지난 4월 27일은 경림이가 열광하는 레이디가가의 한국 공연이 있는 날이였다.

이미 공연 한 달 전에 용돈을 모아 어렵게 친구와 표를 예매했다.  거금 15만원.

하필이면 공연 일이 중간고사 기간.  하지만 그쯤은 각오를 하고...

시험기간이라 연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혹사를 하는데 드디어 그날이 다가오자 사흘 전부터는 레이디가가의 공연을 즐길 준비에 몰입했다.  3집 CD(Born This Way)를 웬 종일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가사를 외웠다.  공연 직전 일에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 천과 안료를 사와 입고 갈 옷을 만들고 안료를 칠해 도발적인 특수 분장을 했다.  그렇게 경림인 밤을 세워 옷을 완성하고 아침 일찍 준비한 도구를 모두 챙겨 학교에 갔다.  수업을 마치고 공연장인 잠실운동장 근처 가게에 들어가 만든 옷을 입고 분장을 하고 입장했다.  격정적인 공연이 끝나고 열성적인 팬들중 레이디가가의 도발적인 패션을 가장 잘 따라 분장한 300명을 뽑았는데 뒷풀이 모임에 초대를 받고 참석을 하고 왔단다.  그리고 밤 늦게 돌아와 다음날 오후까지 끙끙 앓으며 깊은 잠을 자고 나서야 다시 사람의 형색을 회복했다.

 

레이디가가 공연을 위한 분장

 

 

방학이 되어서도 여전히 경림이는 바쁘고 활기차다.

아직도 학과 과제와 위해 동아리 발표 자료 작성을 위해 숱한 밤을 지샌다.

새벽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면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뭔가를 하며 몰두해 있는 경림이를 보면 섬찟할 때도 있지만 워낙 자주 보는 일이라 피식 웃고 만다.

지난 주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하자마자 몇일간 앓아 누웠다.  코피도 흘렸다.

 

다음 주에는 몇 명의 친구들과 외할머니 댁이 있는 부산에 몇 일간 놀러 간단다.  

그것을 위해 인터넷으로 수영복을 사고 기말고사 기간인 경은이를 꼬드겨 데려가 백화점에서 모자와 캐주얼 몇 벌을 사고...  그리고 그 옷 맵시를 내려고 일주일 속성 몸매가꾸기 특수훈련에 돌입했다.  다이어트는 물론...

하루 두 시간 정도의 강도 높은 요가 (제시카 고메즈 버전 요가 비디오를 보며)로 땀이 범벅되어 헐떡이며 몸무게를 재보고 수영복을 입어보고...  쪼르르 달려와 평가를 해달란다.  성의가 괘씸하여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다.

다음 주 또 얼마나 광란의 해운대를 장식하려는지...

 

kw.

딸바보  

'탈고안될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아이...  (0) 2012.12.21
경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0) 2012.09.03
이마트에서  (0) 2012.05.29
장모님 칠순  (0) 2011.07.17
아... 5월 (큰 이모)  (0) 2011.06.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