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통은 취임 후 3년 연속 5.18의거 기념식에 참석하며 <부채의식>을 토로했다.
어쩌면 그의 부채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직도 미제의 5.18을 규명하고 원한을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당시 운동권으로서 특히, 현직 대통령으로서 5.18을 본인 입장으로 진상규명위원회에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채의식> 이란 용어 자체와 어감이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1979년 10.26사태와 12.12군사반란 그리고 1980년 5.18의거 당시 전국적으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그 바탕에 있었다.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로... 특히 군사정권 하에서 10.26사태로 권력 1(박정희), 2(김재규), 3(차지철)인자가 모두 제거되고 또한 12.12군사반란으로 3성 장군급 이상의 군 지휘부를 제거한 군사권력 공백상태에서 비교적 소장파였던 신군부는 위력시범으로 존재감을 보여 국민의 시선과 지지를 끌어 내야만 했다.
당시 비상계엄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민주화 운동은 폭발하여 1980년 5월15일에 서울역에서 10만명의 대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다. (당시 전국 대학생 수는 30만명) 당시 문재인은 경희대 복학 후 사법고시를 치르고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5.17일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다음 날인 5.18에 광주에서 본격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그 시위진압을 위한 군부대 투입과 함께 유혈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문재인은 청량리구치소에서 수감 중 제22회 사법고시 합격증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사법연수원 졸업성적 수석에도 불구하고 보안법 위반 전력으로 희망했던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의 법무법인 <부산>에 입사하여 인권변호사로 일했고 매년 5월18일만 도래하면 소속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 부산 시내로 나가 1인 시위를 했다. 그는 광주에 대한 부채감을 일평생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1980년 5월15일 <서울역 회군>사건이다. 당시 비상계엄 하에 서울역에 운집한 10만명의 대학생 시위. 운동권 주체측도 정부에서도 놀란 대규모의 학생시위. 마치 4.19를 연상하는 엄청난 신군부 퇴진 시위로 당황한 학생지도부에선 격론 끝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미통당 안양동안구 5선)이 군부의 진압과 유혈사태를 우려하여 해산을 결정하고 회군. 당시 엄청난 시위대에 고무된 학생지도부는 신군부 퇴진의 절호의 기회로 여겨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였지만 운동권의 주류였던 서울대의 회군은 전체적인 시위 분위기를 흐지부지 하게 했다. 사실 당시 군부에서도 전세계 주요 언론과 대사관, 외국인 기업이 몰려있는 수도 서울에서 평화시위를 하는 학생시위대에게 감히 발포하여 유혈진압할 엄두도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상계엄 하에서 당연한 두려움이 있었겠지만 시위 취지로 볼 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정이고 비겁한 후퇴였다. 신군부 입장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천행이었다. 심재철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당시 전국적으로 지속됐던 학생시위는 5.15일 서울역 회군으로 서울에서 시들해지고 5.17일 야당 지도자(특히 김대중)와 운동권 학생간부 체포와 함께 5.18일 광주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서울이 잠잠해지자 광주시위를 김대중과 북한이 공모한 사주로 전체 시나리오를 짜고 무력진압을 하여 위력시범을 하여 존재감과 비상시국에서의 혼란 해결자라는 이미지를 연출하려 했다. 신군부 내에서도 시민의 평화시위에 군개입을 반대하거나 주저했던 대부분의 인사들은 제거되거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육군, 특전사, 일부 공군까지 동원된 합동군사작전... 아... 그 살육 살육...
그 부채감의 실체는 당시 서울이 치러야 할 희생을 그리고 자신이 치러라야 할 희생을 무고한 광주시민이 당한 것에서이다. 그 부채감이 있는 사람은 그 진실을 밝힘으로서 그 부채감을 털어내야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숨기 마련이다. 작년에 당시 서울대 운동권 간부였던 유시민은 서울역 회군사건을 잠깐 언급했고 심재철은 발끈하여 대꾸한 기사가 있었다. 암튼 심재철은 군사정권의 후신 보수정당에서 내리 5선을 하고 국회부의장과 원내총무를 역임하고 최근 21대 총선에선 낙선했다. 운동권 출신, 민주화 투사이지만 그가 택할 수밖에 없는 정치노선과 정당. 그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고 지켜줄 정당은 군사정권의 후예인 지금의 미통당인 것이다. 지역구도 경기도 안양 동안구다. (예전 이름 평촌으로 수도권 신흥개발지역으로 부촌이다.) 참으로 안전한 선택이다. 다선이지만 위기에 처한 당의 전략지역보다 안전한 지역구(평촌). 서울역 회군이나 안양 지역구 고수로 내리 5선이나 같은 비겁함과 비양심의 바탕이 있다. 서울대 운동권의 몰락과 우리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KW
www.youtube.com/watch?v=-USv6WxCQ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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