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을 키워보면 싱싱하고 건강하게 윤기나는 잎이나 화려한 자태의 꽃도 좋지만 그윽한 향기를 놓칠 수 없다.
화초는 일년 내내 꽃을 피우기 위해 키운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정성을 쏟으며 기다렸는데 막상 개화기에 꽃이 피지 않으면 일년 농사 헛했다는 허탈과 자괴감이 크다. 오래 전부터 집에서 키우던 중국난이 잎도 무성하고 세력이 좋은데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아 한숨이 나오고 차라리 뽑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나 무덤덤한데 한 달간 집을 비운 사이 돌아와 보니 여러 개의 꽃대가 쑥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핑돌고...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 때부터 꽃이 필 때까지 얼마나 설랬던지. 아침에 출근 전에 잠시 눈을 맞추고 퇴근해서는 옷을 갈아 입지도 않고 달려가 엎드려 바라 보았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나자 드디어 노오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코 끝으로 훅 다가오는 진한 향기... 정신없이 달려가 난분에 얼굴을 박고 화려한 자태와 함께 그 진한 향기를 폐부 깊숙히 넣고 온몸을 적셨다. 황홀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지금도 베란다에 있는 난분에서 꽃이 피면 거실로 혹은 내 방으로 가져와 그 화려한 자태와 진한 향기를 그냥 몰빵으로 즐긴다. 오늘 만개한 이 소엽풍란도 마찬가지다. 벌써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 제법 늙었고 작년 겨울엔 잠깐 방심한 사이 동해(凍害)를 입었는지 잎이 거뭇해지고 뿌리도 매가리가 없어졌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날렵하고 화려한 하얀 해오라기떼를 띄워놓고 그 새들이 풍기는 향기는 코를 찌르다 못해 혼을 빼놓는다. 한여름 눅눅한 공기 속의 난향은 청순한 아가씨보다 훨씬 진한 농염한 중년여인의 향기다. 외관은 늘씬 날렵하고 화려한 자태로 날아갈 듯 하고 향기는 뭇 남자를 정신 못차리게 만드는 유혹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난향천리(蘭香千里)는 더 이상 구라가 아니다. 그 화려한 자태와 향기를 그리는 마음까지 담아 천리를 가는 것이다.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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