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CNN의 장편 대하드라마 <대진제국>을 만끽하고 있다. 어제 제4부 <대진부>의 26회를 보고 재미있는 점이 있었다.
훗날 천하를 통일하여 진시황제로 등극하는 어린 왕, 영정이 태후와 중부(여불위)의 섭정 시기로 재야 사림(士林)들의 술자리 토론이 있었다. 거기 좌장은 훗날 왕의 중부이자 승상인 '여불위'를 몰아내고 중신이 되어 법가(法家)를 실천하여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이사'였다. 거기 술자리 토론에 참석한 재야 인재들은 모두 여불위의 식객으로 저마다 백가 사상으로 무장하여 부국강병과 태평천하를 주장했다.
어떤 이는 혼란스런 전국시대 최고의 왕도(王道)로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에선 인(仁)을 바탕으로한 '덕치(德治)'를 주장했다. 좌장인 '이사'는 선대 효공 시절 중신 '상앙'이 재상으로 강력한 '법치(法治)'를 시행하여 진나라가 부국강성하여 천하통일의 기틀을 잡았다고 주장하며 본인을 그 법가를 계승하겠다고 했다. '이사'는 타국 출신(초)의 객신(客臣)이라 권력 기반이 약했지만 승상 '여불위'의 천거와 지지 글고 진왕(秦王), 영정의 후광 속에 강력한 법치로 강성대국 건설과 함께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도모하겠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제자백가(諸子百家, Hundred Schools of Thought)
그가 말한 법치란 법(法), 술(術), 세(勢)를 뜻하며 단순히 법과 제도로서 백성의 권익을 보호하고 공평무사하게 다스린다기보다는 왕이 신하와 백성을 복종시키고 통치하기 위하여 우월한 지위에서 확고한 위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하여 법치를 운용함에 있어 "세(勢)-권위와 세력 > 술(術)-통치의 기술 > 법(法)-법과 제도"의 순서로 우선하였다. 차라리 마키아벨리(1469~1527, 피렌체 공화국 정치가)의 <군주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 마디로 통치자의 자질을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 으로 주장한다.
당시 두각을 나타낸 도가, 유가, 법가, 묵가 포함 모든 제자백가 사상은 혼란스런 당시 춘추전국시대 군주나 제후 등 최고 지도자의 통치철학 내지 왕도(王道)를 설파한 것이었다. 하여 열국에서는 그 사상을 채택하고 문하생을 중용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였다. 주창자나 문하생들은 자국에서 중용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적국일지라도 찾아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섬겼고 그들의 정치철학을 펼쳤다. 공자도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6국을 돌아다니는 소위 '천하주유'를 했다. 결국 중용되진 못했지만. 대단히 유연한 사고와 뚜렷한 자기 주관이었다. 그래서 '백가쟁명(百家爭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이란 표현이 재미있다. '여러 학파가 서로 다투며 울부짖는다' 어쩌면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치기 위해 또한 그것으로 중용되어 출세를 하기 위해 벌이는 아귀다툼의 의미가 뭍어난다. 하여 당시 군주나 제후의 통치방식 내지 왕도로서 제자백가 사상은 일반 백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춘추전국시대나 이후 중국 역사에서 역대 군주와 제후들은 이들 제자백가를 ~'자(子)'를 붙여 대학자 혹은 성현으로 추앙했지만 온전히 한 쪽의 사상에 치우쳐 통치이념으로 삼아 경도된 적은 없었다. 그 어느 사상과 종교도 주류가 되어 오래간 지속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다. 중국공산당은 밀려오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물결에 조선의 유교식 위계질서를 역수입하여 충(忠), 효(孝)와 예(禮)를 강조하는 통치방식을 일부 채택하고 있다. 하여 중국 정부는 공자와 맹자의 사당과 유적지를 다듬고 관광지화하며 거리에는 유교식 질서를 그린 슬로건의 포스터와 화보를 자주 볼 수 있다. (2015년 중국 장쑤성 수저우 거리 곳곳에서 흔히 보았다.) 그래서 중국역사에선 온전히 도가국이나 유가국 혹은 법치국도 없었다. 중국의 자생 종교든 외래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여태까지의 중국 왕조는 스스로의 왕도에 따라 그들을 시의적절하게 활용만 할 뿐이었다.
그런 2천년도 넘게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 하나인 유가사상 그리고 그것이 진화한 주자학에 영향받아 공맹 천지의 5백년 유교국(儒敎國)을 만든 조선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유교식 질서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구순을 앞둔 노부모는 우리 형제 중 동생이 더 출세하고 부자가 되어 형이 위축되는 것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형제들이 대화를 하면 아직도 형에 대한 예의를 동생들에게 타이른다. 그러면 집안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정치인이 정적일지라도 나이 든 상대방에게 대하는 태도나 발언에서 예의를 따지며 때론 낙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사에서 유래가 드문 단일 씨족의 이씨 왕조 5백년이 지속될 수 있었다. 부지런한 조선의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해 신하와 소통하고 정치를 했다. 말 그대로 중국의 고전인 '四書六經'을 읽고 그것에 빗대어 조정의 중요사를 해석하고 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신하 중 누군가를 추켜세워 충신으로 혹은 비난하며 역적을 만들리도 했다. 조선 중기 중신이자 대유학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높은 유교적 학덕으로 유일하게 공자, 맹자와 주자(朱子)의 제자 반열의 '송자(宋子)'의 칭호를 받았지만 그도 그런 유교적 질서 속에서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다. 일명 사문난적(斯文亂賊)
사건과 그로 인한 분파로 상대파와 벌인 '예송논쟁(禮頌論爭)'으로 말이암아.
어쩌면 중국의 유가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조선식의 성리학과 실학이라 하겠지만 조선의 정치와 사회는 그 사상으로 인한 '경도(傾倒)와 매몰(埋沒)'이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원래는 주로 군주와 정치 지도자의 통치철학과 도리를 모든 백성이 받들고 따라야 할 규범과 덕목으로 확대시켜서 말이다. 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도 없는 유교(儒敎)라는 종교로 승화시켰다.
예전 어릴 때 살았던 고향 진주의 향교에선 길 옆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거기서 몇 십 미터를 들어가면 홍살문이 있고 좌우에 여러 송덕비를 지나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미음(ㅁ) 자의 여러 채의 본 건물이 있고 그리고 또 계단을 올라가 맨 뒤에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당시 매년 공자의 기일이 되면 진주 일대의 유생들은 그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때면 하얀 두루마기와 도포를 입고 챙넓은 갓을 쓴 늙은이들이 구름떼같이 몰려 들었고 어린 우리는 제사가 끝나길 기다려 제사음식인 떡과 과일을 얻어 먹었다. (그 때가 1970년대이다.)
아직도 21세기 한국에는 2천년 전 제자백가의 갈래였던 유가와 도가 사상이 종교가 되어 우리의 정신세계에 건재하다.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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