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안될 전설_2(엄마)
2010.1.2(토)
우리사회를 바꾼 큰 사건 중에 88년 올림픽이 있다. 건국이래 가장 큰 국제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정권하의 당시 한국사회는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돌입했다. 대회기간중 단 하나의 국제경기도 없었던 내고향 진주에서도 법석이 벌어졌다.
당시 우리집은 진주의 외곽인 ‘도동’에서 상치, 쑥갓 같은 야채를 기르다 별로 수지가 맞지 않아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상대동에서 콩나물 난전을 열었다. 거기는 당시 인근시골에서 수확한 과일이나 야채들이 거래되는 임시 난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엄마가 콩나물을 비롯한 야채들을 하나 둘씩 갖다 놓고 팔고 한두 사람씩 따라 전을 펴자 곧 정규시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것에 힘입어 나중에는 콘크리트 건물로 상가가 들어섰다. 하여 상가를 둘러싸고 난전과 함께 큰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고 진주 중앙시장의 상권이 나누어져 도동일대 진주 부심권의 중심시장으로 성장했다. 거기의 많은 상인들은 엄마가 야채장사하는 것을 보고 시작하여 상대시장을 만든 산파역을 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엄마가 장사를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나고 그럭 저럭 시장이 커나가 제법 자리값을 내고 권리금을 매길 정도로 알뜰한 상권으로 성장할 무렵… 난전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 88년 올림픽을 앞둔 87년말 진주시로부터 상대시장 난전 철거명령이 떨어졌다.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근데 이면에는 큰 돈을 들여 지은 상가보다도 난전이 장사가 더 잘되니 상가입주인들이 시청을 꼬드긴 결과이기도 했다.
시청에서 몇 차례 자진철거를 권하다 두어평 남짓한 장바닥에 가족의 생계가 달린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시청은 용역철거반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철거작업에 나섰다. 많은 난전의 상인들이 엄마주변을 서성이며 뭔가 시청공무원들과 협상을 하던지 아니면 항의를 해야 되지 않느냐며 재촉을 했다. 그들 사정도 그러했지만 사실 우리집 형편도 절박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뾰족히 대항할 명분이나 타협점을 찾기가 어려워 결국 부딪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졸업을 일년 앞두고 겨울방학을 맞아 엄마의 난전 장사를 돕고 있었다. 물을 떠다주고 팔 것들을 갖다주고 진열해주는 허드렛 일이였다. 아마 12월 어느날 오후 3시쯤이였을 것이다. 상인들이 평소처럼 팔 물건들을 정리하고 손님 맞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 끝쪽에 포크레인 한대와 트럭 여러 대 그리고 수십명의 철거반원이 집결했다. 시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상인들은 웅성거렸다. 몇몇 상인들은 우리난전 앞을 서성이며 엄마가 좀 나서야 하지 않느냐며 눈치를 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나도 형편이 너희와 다르지 않다. 나도 이걸로 자식새끼들 먹여 살려야 하니 끝까지 버텨볼란다.” 라며 애써 태연한 척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철거작업이 시작됐다. 멀리서 포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돌진하고 가게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악을 쓰는 상인들의 소리가 우리가게로 점점 다가왔다. 그래도 손님들은 우리가게에서 야채를 샀고 엄마는 평소처럼 장사를 했다. 그리고 혈기방장한 아들이 무슨 사고라도 칠까 경거망동 말라며 연신 주의를 주었다. 이윽고 바로 옆가게까지 철거를 하고 우리가게를 손대기 직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공무원이 나서 엄마에게 다시 한번 간곡히 철거에 협조해달라는 명령 아닌 애원을 했다. 엄마는 그때 너무도 초연히 말했다. “당신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공무집행을 하는 사람이니 그렇게 하시고 나는 여기에 우리집 생계가 달려있으니 이 가게를 지킬 뿐입니다.” 고개를 떨군 공무원이 철거반원에게 눈짓을 보내자 우리가게를 부수며 철거하기 시작했다. 포장이 찟겨나가고 가게가 반쯤 부서져 해체되었을 때까지도 엄마는 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해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였다.
그다음 상황은 돌변했다. 여태까지 악을 쓰며 울부짖기만 했던 상인들이 쓰러진 엄마를 부축하며 철거반원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눈이 뒤집힌 그들은 손에 잡히는 뭐든 집어 던지며 철거반원을 위협했다. 그리고 엄마가 쓰러진 근처에 진주 MBC에서 취재를 나온 안면이 있는 기자도 보였다. (아마도 형님의 초등시절 친구인 것같았다.) 그 기자가 우리가게와 철거반원에게 카메라를 갖다대자 당황한 공무원은 철수를 지시했다.
아수라장이 된 시장에서 시장상인들이 엄마를 눕혀 정신을 차리게 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정신을 차린 엄마는 아직도 백지장같은 얼굴로 온몸을 부들 부들 떨며 하지만 단호하고 조용히 사람들에게 시청으로 가자고 했다. 사람들은 살기등등하게 엄마를 이불로 감싸 트럭에 눕히고 시청사로 쳐들어갔다. 시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이미 시장은 피신하고 없었다. 엄마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사람들과 시청사에서 추위에 떨며 밤샘농성을 했다. 다음날 보다 못한 부시장이 대신 나와 상대시장 난전대표격으로 엄마를 포함한 몇몇 사람과 면담을 했다. 반나절을 밀치고 당기고 한 끝에 타협이 되었다. 난전상인들의 생계가 달려있으니 철거보다는 미관을 고려하여 주변환경 개선과 통일된 규격의 천막과 진열대 설치 그리고 깨끗한 위생관리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그 비용도 시정부와 상인들이 분담을 한다는 조건이였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시장 난전이 미관을 고려한 개보수 작업이 시작되었고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개월 전 깔끔한 외관으로 더욱 번성하는 시장으로 건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고 우리 형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하나 둘씩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는 손자를 돌본다는 구실로 정든 난전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로는 제법 되는 액수의 권리금까지 받고 다른 상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인제 자식들이 성장하여 그럭 저럭 먹고살만한 형편에도 엄마는 시장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아직도 그곳 상인들과 계를 하며 길흉사를 같이 나누고 친분을 지속한다. 엄마는 자식들이 명절날 오게되면 우리 손을 잡고 같이 시장을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필요한 물건이든 아니든 항상 그곳에서 뭐든 사들고 온다. 그곳 상인들은 모두 반가운 인사를 하며 엄마와 우리를 환대한다. 마치 여왕의 행차처럼…
KW
'탈고안될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5월 (큰 이모) (0) | 2011.06.01 |
---|---|
전설_6 (큰 형2) (0) | 2011.01.21 |
전설_5(큰 형) (0) | 2011.01.21 |
전설_4 (작은 형) (0) | 2011.01.21 |
전설_3(엄마2) (0) | 2010.01.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