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안될 전설_3(엄마2)
2010. 1. 20(수)
작년 4월. 매년 봄과 가을에 한번씩 엄마와 예정된 여행에서 이번에는 엄마가 고향가는 길을 따라 진주근처 서부경남의 여러 시골장을 들러자고 했다.
하여 진주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북창(대곡)을 지나 상정 그리고 의령장을 지나갔다. 북창에서 고개를 넘어 덕교로 내려가는 고개길에서 내옆에 앉은 엄마는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를 나직이 얘기했다.
엄마는 아홉살에 외할머니를 여의었다. 전설 같은 얘기지만 외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인근일대에서 장사(壯士)로 불렸다 한다. 하여 외가 인근에서 읍내격인 북창장터에서 벌어진 씨름판에서 외할아버지는 우승상으로 더러 쌀말을 메고 돌아 오기도 했다 한다. 그렇게 가끔씩 장터에 나가 좁은 골짜기의 답답한 시골에서 벗어나 바람이나 쐬었던 외할아버지는 장터의 국밥집에서 일하던 한 처녀를 눈여겨 두고 보았다. 깐깐한 집안 분위기로 맺어지기 힘든 사정을 알았던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밤 그 처녀를 보쌈으로 들쳐업고 야반도주를 하였다.
아마 1920대 말 혹은 1930년대 초였을 것이다. 애초의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배를 타야 하니 부산방면으로 향했다. 처녀를 보쌈해서 도망치는 신분이니 사람의 눈이 두려워 밤에만 무작정 걸었다 한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김해. 그곳은 고향동네에서 보지 못한 너른 들판이 있었다. 일단 외할아버지는 허기를 면하고 처녀를 재울 곳을 찾아 그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로 보이는 집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머슴을 청했다. 외관으로도 기골이 장대하고 힘꽤나 써 보이니 늙은 주인은 하늘이 보내준 일꾼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해 추수가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자식삼자며 붙잡는 주인내외의 아쉬운 배웅을 받으며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이후 비교적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던 오사카에 정착하여 온갖 고난을 겪으며 자리를 잡아나갔다. 딸 셋을 두었고 둘째 딸인 엄마를 오사카에서 제법 떨어진 동경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일제치하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외할아버지는 낯선 일본땅에서 집을 세놓고 살 정도로 풍족함을 누리면서 조선의 친척들에게 송금을 해서 고향에 제법 땅을 사두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아홉살이 되던 해. 외할아버지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사판을 벌이고 사업에 정신없이 바쁜 사이 외할머니는 신음신음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다. 당시 어린 엄마의 기억으로는 어느날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온 집안이 하얀 꽃으로 뒤덮힌 것만 떠오른다고 했다. 타국에서 고생 끝에 겨우 살만해졌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니 극도의 슬픔과 허탈에 빠진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일본에 있는 재산을 미쳐 다 처분도 못하고 대강만 건져 왔다고 나중에 미련을 두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외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고향으로 갔다가 그 이후 덕교의 고모할머니댁에서 자랐다 한다. 엄마의 한(限)은 거기서부터였다. 우리 자식들은 안다. 엄마가 모진 시집살이와 고향에서 도시로 분가를 해서 겪은 혹독한 생활고와 아버지의 끊임없는 비관과 불화 속에서도 네 아들을 끝까지 지킨 것은 엄마의 한을 자식들에게 넘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사춘기를 지나고 아직 소녀티가 가시기 전 열일곱살에 그곳에서 몇 개의 산을 넘어 지금의 내고향에서 한살 위의 아버지와 혼례를 치렀다. (당시 고향의 할아버지는 ‘꾀돌이’ 혹은 ‘조조’ 라는 별명으로 착실히 전답을 마련하여 인근에서 춘궁기때 할아버지의 장리쌀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재(異財)에 밝았다 한다. 하여 엄마는 제법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집살이에서 머슴이 여럿이고 잔치가 많아 손님이나 일꾼들 마실 술을 담그는 것이 일과가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시 시골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진주로 유학하여 고등학교를 다녔고 방학 때만 겨우 고향집에 잠시 들러 쉬었다 갈 뿐이였다. 이후 아버지가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부산으로 직장과 사업차 여기 저기를 전전하자 가세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대처로 나가 기약도 없고 그사이 우리 형제는 하나 둘씩 태어났고 진주로 분가(分家)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약간의 땅떼기와 집으로 연명을 했다. 큰 형이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동생들을 돌봐줄 정도가 되어 엄마는 견디다 못해 막내를 업고 장사를 나섰다.
여기서부터 엄마의 이야기다.
몇 번을 망설이다 엄마는 시골장으로 나가 한쪽 귀퉁이에서 몇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다. 간혹 안면있는 시골친척들이나 동네사람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장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그래도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모두들 혀를 끌끌 찼다고 했다. 엄마는 얼마나 부끄럽고 서럽든지 동생을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새댁이 하도 보기에 안됐든지 옆 사람이 장사를 거들어 주었고 엄마는 눈짐작으로 따라하여 좌판을 키워나갔다. 처음에는 야채나 과일을 팔다가 외가로부터 돈을 융통하여 진주중앙시장에서 점포를 내서 옷가게를 시작했고 가만이 앉아 장사를 하는 것이 수지가 맞지 않아 나중에는 서부경남의 시골읍내로 5일장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렇게 엄마는 30년 동안이나 이곳 저곳 장터를 전전하며 장사를 했고 자식들을 키웠다.
그날은 엄마가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한 그 장터(상정)를 지나갔다. 엄마는 그때의 그 부끄럽고 민망함, 서글픔 그리고 이후 모진 세월을 담담히 얘기했다.
내가 최근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던 모양이였다. 도대체 나는 세상에 무엇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내가 그때 엄마의 심정에 백분의 일이나 될지언정...
그 막막하고 힘겨웠던 시절 친척의 잔치집에서 풀이 죽은 엄마가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듯 말듯 나직이 부른 노래가 있었다.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엄마는 그 암담하고 모진 세월의 한을 읇조리듯 나직이 그렇게 노래했다.
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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